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1990년 8월 2일 이라크군대는 인접한 국경을 넘어 쿠웨이트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오래 전부터 접경 부근의 유전지대에 대한 영유권을 놓고 잦은 분쟁을 일으켜 왔었다. 8년간에 걸친
이라크-이란 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순식간에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이었다.
1990년 8월 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라크에 대해 무역제재조치를 취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쿠웨이트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미국, 영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 한국 등을 포함한 36개국으로 다국적군이 구성되었다.
이라크를 쿠웨이트 영토로부터 축출하고 쿠웨이트의 주권을 회복한다는 명분하에 전면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페르시아만에서 발발한 이 전쟁을 걸프전이라고 부른다. 이라크군대가 쿠웨이트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1991년 1월 16일부터 2월 28일까지 44일간 계속되었다.
구소련의 붕괴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개혁은 먼저 동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유럽 국가들은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의 봉기로 공산정부가 거의 다 붕괴했으며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소련의 여러 지역에서도 지방정부에 더 큰 자유를 줄 것을 요구하는 대중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1990년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선언했고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도 중앙정부에 분리를 요구했다. 1990말 15개의 공화국이 모두 자국의 입법부에서 통과한 법률이 중앙정부에서 통과한 법률보다 우선한다고 선언하게 된다. 더 이상의 분열을 막으려고 고르바초프는 공화국들의 요구를 수용한 연방조약을 제안한다.
1991년 7월 고르바초프와 10개 공화국 지도자들은 공화국에 자치권을 많이 허용한 조약에 합의하고 8월 20일 5개 공화국이 그 조약에 서명하기로 했다. 조약에 서명하기 하루 전인 8월 19일 보수파 공산당 관리들이 고르바초프 정부에 반대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일어나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 옐친은 국내와 해외에서 명성을 얻게된다.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서기장직을 사임했고 최고소비에트에는 공산당 활동을 무기한 정지시켰다. 1991년 9월 임시정부는 발트해연안에 있는 세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한다.
공화국들은 쿠데타 실패후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했다. 11월 13일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을 제외한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한다. 12월 8일 옐친과 우크라이나의 벨로루시 대통령이 민스크에서 새롭고 느슨한 연맹체를 구성한다고 발표한다. 1991년 12월 25일에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소련은 공식으로 해체되었다.
다시보는 걸프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1990년 8월 2일에 있었습니다. 1991년 1월 28일에 종전 되었구요. 그리고 구소련의 해체는 1991년 12월 25일 입니다. 대략 일년 약간 못되는 시차가 있습니다. 1차 걸프전은 미국의 의도적 기만으로 발발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구소련의 몰락도 미국의 작품이라고 하지요.
미국은 1990년 부터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구소련의 몰락시기를 어느정도 예측하고 있었을 겁니다. 이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도 해놓았었 겠지만 가장 신경쓰이는 것이 중동의 맏형노릇을 하려는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디서 핵무기 준다고 하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들 위인이지요.
만일 후세인이 쿠웨이트 침공을 일년만 미루었었다면 중동의 정세와 영어의 몸이 되어버린 그의 처지가 지금같지는 않았을 듯 합니다. 구소련의 붕괴가 일년만 빨랐었더라도 마찬가지 이겠지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구 소련의 몰락이라는 양대사건이 가지고 있는 일년의 시차는 그래서 의미가 큰것 같습니다.
구소련 균열의 조짐을 제대로 감지하고 때를 기다렸었더라면 후세인은 중동의 패자로 등극했을 겁니다. 물론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라 만약이라는 가정도 별 효용성은 없습니다. 다만, 후세인이 일년의 시차로 어떠한 극과극을 가질 수 있었는지 분석해 보는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것 같아 글을써봅니다.
후세인이 구소련 붕괴의 혼돈기를 틈타 군부의 무기밀매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쿠웨이트를 침공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겁니다. 내륙에 있는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점령해야 항구를 확보해 해군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됩니다. 해군력은 아니더라도 바다를 통한 보급로가 열리게 되지요.
구소련으로 부터 밀매된 핵무기가 바다를 통해 쿠웨이트에 도착하는 시기에 맞추어 침공한 후 인도받은 것으로 핵무장 선언을 해버렸다면 미국도 어쩌지 못했을 겁니다. 250여기의 핵무기와 두자리 숫자의 잠수함이 구소련 해체시기에 증발했다고 합니다. 이라크가 구소련 해체 최대의 수혜자가 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후세인은 쿠웨이트의 금고나 털며 놀고 있었더군요. 핵무기 결제대금으로 제격이었는데 말이죠. 법정에서 큰소리 치는 그 기백만큼의 웅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소탐대실하지는 않았었을 겁니다. 미국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을 조장한 것에는 이러한 우려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미국의 전략적 움직임은 높이 평가할만 합니다. 후세인을 그대로 두고 구소련의 붕괴를 맞이했었다면 이라크의 밀수 핵무장이 실현되었을 가능성이 높지요. 다만, 그렇게 철저한 조치가 이라크에서만 효과를 보았다는 것이 기울어가는 제국의 한계로 보입니다. 미국의 몰락은 구소련 붕괴가 뇌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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