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seoprise.com 날짜 : 2005년6월10일 06시19분
정신적 측면을 중시할 것인가, 아니면 물질적 풍요를 우선할 것인가. 아주 오래 전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화두 하나가 이것입니다. 가끔 두 가지의 균형을 유지하는 중용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제게는 너무 거창한 주제라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잡힐 것만 같은 신기루를 더듬어 왔습니다.
생각을 정리해 보는 이 글이 갈무리될 때쯤이면 반 토막이라도 건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로 손가락을 쥐어짜 보겠습니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누구나 한 번쯤 심각하게 생각해 본 자존적 정신의 물음일 겁니다. 나의 근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영혼이 존재한다면 생의 전후에 있는 칸막이를 거두어 무지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렇듯 내일을 알 수 없는 공포는 늘 사람을 현혹시켜 짐승에 가까운 전쟁의 광란을 일으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앞세운 미국의 전쟁도, 기실 자국의 패권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본능으로 증폭시킨 결과에 불과합니다.
지구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지만 나약한 평정심을 종교에 기댄 채 신을 끌어들여야 비로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기독교 기반의 서구정신은 ‘종말론’이라는 종착역을 만들어 낸 후에 안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예정된 때가 도래하면 그토록 두려워하던 미지의 내세가 펼쳐질 것이다. 그러니 골치 아프게 고민하지 말고 현세에 충실하자는 주장이 성립됩니다. 어차피 선한 자 악한 자 구분 없이 동시에 맞이할 죽음이라면 면죄부 있는 구원종교를 열심히 믿으며 즐겁게 사는 게 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립되는 현실주의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거두고 정복자로 거듭나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패권주의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동양에 뒤처져 있던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이 시작됩니다.
야만스런 동물의 한계인 공포심을 신에 의탁해 벗어난 것이지요. 항거불능의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서구는 종속에서 벗어나 객관적 관찰자로 발전했습니다. 신의 영역으로 분류하던 자연을 정복과 분석의 대상으로 정의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대대적인 정복전쟁이 시작되고 약탈한 문물을 기반으로 서구문명의 꽃이 만개해 뒤늦은 자격지심을 콧대로 세웠습니다. 면천을 하면 관직을 얻고 싶고 관직을 얻으면 승차(陞差) 하고 싶은 본능을 여실히 드러내는 행태입니다. 하지만 서구가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계가 하나 있습니다. 다른 세계의 문물은 가져갔지만 그 정신적 토대인 영혼을 빠뜨려 물질적 토대만 기형적으로 성장시킨 것입니다.
자본주의라는 물질기반 사회를 성공적으로 구축하며 전 세계의 물질문명을 빨아 들이는데 성공한 서구는 거대제국 로마의 패권을 다시 한 번 꿈꾸고 있는 모양입니다.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와 로마가 멸망한 전철을 다시 한 번 올라타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서구가 물질제국의 종말론적 역사공식을 바꿀 수 있을까요? 그들이 미개하다고 믿는 다른 세계의 낙후된 물질문명이 그 절제를 통해 상상하기 힘들만큼 오랜 세월을 유지한 영혼의 성숙함 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질적 팽창을 제어하지 못한 인간권력은 항상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피라밋 구조를 통해 유지해야 하는 소수집중형 수직적 권력구조는 승전을 거듭할수록 통제력이 반감되어 몰락을 수반합니다.
소위 미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수평적 형태의 권력분점을 주장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라밋을 벗어나지 못해 물질에 속박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숭고한 정신적 가치가 자본이라는 물질에 박제되어 자유의 여신상에 깃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벗어나고자 서구의 야만시기에 인류가 모색한 것이 바로 ‘물질에 대한 영혼의 경외심’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는 차치하고 동북아의 패권을 차지했었던 우리나라만 살펴보겠습니다. 석기, 청동기, 철기 등 문명의 전환점에서 선두를 유지해 왔었던 것이 우리민족입니다. 식민사관이 이를 부정한다면 임진왜란 때 등장했던 거북선으로 짚어 보도록 하지요. 이 새로운 개념의 전함은 1,2차 세계대전 때 위력을 떨쳤던 잠수함에 비견되는 획기적인 무기였습니다.
비록 연안방어를 위해 건조된 전함이지만, 타국의 전략적 해안 요충지를 점령한 후 투입 한다면 침략전쟁을 뒷받침 해주는 막강한 패권무기가 됩니다. 혼까지 빚어낸 청자와 백자를 만들던 물질적 창의력이 서구처럼 내달렸다면, 결코 거북선 하나로 침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반도체로 융기하기 시작한 삼성과 줄기세포로 각광받고 있는 황우석 박사의 연구 성과는 산맥을 끊기 어려워 먼 길을 돌아가던 우리의 민족혼을 서구적 물질문명이 강압해 금기를 해제해 버린 결과입니다.
거북선과 백자를 만들었던 역사상 유례가 없는 500년 조선은 상위층인 선비들의 청백리 사상이 물질적 수요를 감소시켜 얻어진 결과입니다. 조선이 다른 나라와 달리 외침을 자제할 수 있었던 것은, 끝없이 폭증하는 권력의 물질욕구를 이렇듯 무난히 소화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선도 말기에 횡행한 집권층의 물질적 욕망이 외세를 불러들여 망국으로 치달은 것을 보면,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권력이 가져야할 기본이 무엇인지 준엄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끝없는 욕망의 피라밋에 매장된 서구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숭고한 가치조차 물질적으로 재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유민주주의를 전쟁의 빌미로 삼은 물질민족은 끝없는 분란을 야기 시키려 합니다. 신의 뜻을 내세워 종말을 부둥켜 안은 채 구원까지 탐하는 기도도 잊지 않고서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려는 욕망은 신의 지위까지 탐하는 바벨탑을 만들게 됩니다. 하나였던 언어가 수천갈래로 나누어지듯 찢기워질 자국의 운명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광명개천(光明開天),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가 가지는 천지일합의 진리는 이 우주가 하나의 존재에서 나뉘어져 다시 하나가 된다는 윤회의 이치를 천부경을 통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하나에서 파생된 사람과 원숭이와 벌레가 다르지 않으며 나무와 산, 흙 또한 우리의 육신이 스러져 돌아가는 출발점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나무베기를 두려워하고 산허리 자르기를 기피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대부분의 동물을 같은 격으로 예우하며 공생을 모색한 불교의 커다란 근원이기도 합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윤회하는 하나의 단위로 개념할 수 있는 완성된 정신은 전생을 두려워합니다. 전생의 모자람을 현생의 노력으로 메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윤리는 현생의 잘못이 내세의 짐이 되는 것을 피하려 합니다. 정신적 가치를 우선할 수 있었던 기반입니다.
서구화가 덜 되었던 60년대까지만 해도 계산을 모르는 순박했던 우리의 정서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안타깝게도 현생을 중시하는 서구적 가치가 휩쓸어버린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교시가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일에는 도가 있습니다. 몸가짐을 예의 경지로 승화시킨 유교의 법도가 있고 검을 움직이는 법을 터득하여 길을 닦아 놓기도 합니다. 이렇듯 영혼과 물질을 합일시킨 경지를 도라고 합니다. 그 도를 이어받아 후대에 계승하는 것이 단절된 전통을 되살리는 길입니다.
우리민족이 가야 하는 길은 우주만물과 영혼이 합일된 재세이화입니다. 바로 물질문명을 넘어서서 내세에 이어질 영혼을 완성했던 조상들의 숭고한 뜻입니다. 그 절대의지가 바로 우리의 영혼에 담겨져 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시끄러운 생각들을 놓아버리면 시공을 초월한 아주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요? 추측입니다만, 그래도 약간의 체험은 있었습니다. 마음이 아프다거나 양심이 찔린다거나 사랑의 기쁨을 느끼는 곳이 바로 영혼입니다. 사랑을 잃었을 때 구멍이 뚫리는 곳, 의지가 가로막혔을 때 답답해지는 곳이 영혼입니다. 왼쪽 가슴 바로 아래가 그 곳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람의 영혼 위에 뛰놀고 있는 심장으로 완성됩니다. 영혼의 반석으로 물질의 십자가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무엇 때문에 부활을 통해 성령으로 흩어지며 사람들의 영혼이 되고자 했을까요? 그것도 물질문명에 속박당한 사람들의 터전에서 말입니다. 왜 다른 세계에는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하지 않았을 까요? 그분께서 보시기에 구원이 필요한 유일한 곳이 물질민족인 유대가 흩어져 살아갈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완성되어 물질욕구를 다스리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독생자의 구원이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나 기독교가 믿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성을 부정하시는 분들께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종교란 인간 수용체가 받아들이고 계승해온 가치추구의 결정입니다. 사람 죽이는 검에도 영혼이 깃든 도가 있듯이 사람이 믿는 종교에도 영혼이 스며들어 녹아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종교가 매개한 영혼들이 거대한 지력을 발휘한 것이라면 부활의 진위여부를 떠나 이치 합당한 부분에는 예의를 갖추는 것이 또한 사람의 도라는 것입니다.
서구화에 의한 물질문명의 확산은 분명 천주교와 기독교의 영혼구원적 활동이 필요할 겁니다. 다만, 종교 또한 물질의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일 바에는 지고지선의 역할을 해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속해있는 물질계의 과학적 이치와 영혼계의 종교적 의미를 동시에 설파한 천부경으로 해법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 하나에서 비롯되었으니 그 다른 각각의 하나가 이를 깨달아 상쟁을 종식하는 공존으로 제세이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의 절대의지라는 것을 인류공통의 가치로 공유해 제 종교가 매몰된 물질을 거두어 내는 것이 우리민족에게 주어진 역할입니다.
줄기세포를 이용해 난치병을 치료하려는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각 종교들이 윤리를 내세워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경청할 만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듯 합니다. 하지만, 물질로 교세를 세운 종교들이 영혼에 해당하는 윤리에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이 어딘지 어색해 보입니다.
어차피 인류가 내딛은 발이라면,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라면 인류공존을 지켜야 할 탈선민한 영혼민족이 앞서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핵을 보유한 물질민족의 배타적 행태가 생명공학 분야까지 점령하게 놓아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구를 생명체로 개념해 가이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뭇 생명체들이 세운 거대한 신전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요. 그 신전의 지붕위에 얹는 쐐기돌이 세계의 모든 힘이 충돌하고 있는 한반도입니다. 우리민족이 영혼의 가치를 간직한 채 이곳에 머물고 있었던 이유가 현생인류의 공멸을 막고자 하는 하늘의 뜻이라고 헤아려 봅니다. 우리의 가치를 시공의 제약 없이 전 세계로 전파할 수 있는 인터넷이 그 의지중 하나이고, 전인미답의 완성된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는 진통이 또 하나이며, 북핵으로 맞물리는 쐐기돌의 구도가 완성되려는 것이 나머지 하나입니다.
앞으로 나아갈 인류의 가치는 전 세계의 군사력과 문화와 종교가 경제교역 중심지가 될 한반도에서 융합되어 탄생해야 합니다. 분리되어 충돌했던 영혼과 물질을 통합시키고 그 흐름을 조율하는 쐐기돌이 제자리를 찾는다면 공멸을 면한 현생인류가 우주로 뻗어 나가는데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주로 나가야 하는 물질적 확장을 제어하게 되어 가이아의 품에서 구원을 찾을 수도 있겠지요. 인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아직 지구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핵 선제공격을 운운하는 미국이 인류의 공적으로 전락하는 이유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가 미국의 이성을 깨워 인류종말의 대속제물로 스스로 전락하려는 어리석음을 버리는 길로 인도해 주기를 기도합니다.
ⓒ jbLee
정신적 측면을 중시할 것인가, 아니면 물질적 풍요를 우선할 것인가. 아주 오래 전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화두 하나가 이것입니다. 가끔 두 가지의 균형을 유지하는 중용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제게는 너무 거창한 주제라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잡힐 것만 같은 신기루를 더듬어 왔습니다.
생각을 정리해 보는 이 글이 갈무리될 때쯤이면 반 토막이라도 건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로 손가락을 쥐어짜 보겠습니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누구나 한 번쯤 심각하게 생각해 본 자존적 정신의 물음일 겁니다. 나의 근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영혼이 존재한다면 생의 전후에 있는 칸막이를 거두어 무지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렇듯 내일을 알 수 없는 공포는 늘 사람을 현혹시켜 짐승에 가까운 전쟁의 광란을 일으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앞세운 미국의 전쟁도, 기실 자국의 패권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본능으로 증폭시킨 결과에 불과합니다.
지구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지만 나약한 평정심을 종교에 기댄 채 신을 끌어들여야 비로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기독교 기반의 서구정신은 ‘종말론’이라는 종착역을 만들어 낸 후에 안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예정된 때가 도래하면 그토록 두려워하던 미지의 내세가 펼쳐질 것이다. 그러니 골치 아프게 고민하지 말고 현세에 충실하자는 주장이 성립됩니다. 어차피 선한 자 악한 자 구분 없이 동시에 맞이할 죽음이라면 면죄부 있는 구원종교를 열심히 믿으며 즐겁게 사는 게 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립되는 현실주의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거두고 정복자로 거듭나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패권주의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동양에 뒤처져 있던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이 시작됩니다.
야만스런 동물의 한계인 공포심을 신에 의탁해 벗어난 것이지요. 항거불능의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서구는 종속에서 벗어나 객관적 관찰자로 발전했습니다. 신의 영역으로 분류하던 자연을 정복과 분석의 대상으로 정의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대대적인 정복전쟁이 시작되고 약탈한 문물을 기반으로 서구문명의 꽃이 만개해 뒤늦은 자격지심을 콧대로 세웠습니다. 면천을 하면 관직을 얻고 싶고 관직을 얻으면 승차(陞差) 하고 싶은 본능을 여실히 드러내는 행태입니다. 하지만 서구가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계가 하나 있습니다. 다른 세계의 문물은 가져갔지만 그 정신적 토대인 영혼을 빠뜨려 물질적 토대만 기형적으로 성장시킨 것입니다.
자본주의라는 물질기반 사회를 성공적으로 구축하며 전 세계의 물질문명을 빨아 들이는데 성공한 서구는 거대제국 로마의 패권을 다시 한 번 꿈꾸고 있는 모양입니다.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와 로마가 멸망한 전철을 다시 한 번 올라타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서구가 물질제국의 종말론적 역사공식을 바꿀 수 있을까요? 그들이 미개하다고 믿는 다른 세계의 낙후된 물질문명이 그 절제를 통해 상상하기 힘들만큼 오랜 세월을 유지한 영혼의 성숙함 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질적 팽창을 제어하지 못한 인간권력은 항상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피라밋 구조를 통해 유지해야 하는 소수집중형 수직적 권력구조는 승전을 거듭할수록 통제력이 반감되어 몰락을 수반합니다.
소위 미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수평적 형태의 권력분점을 주장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라밋을 벗어나지 못해 물질에 속박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숭고한 정신적 가치가 자본이라는 물질에 박제되어 자유의 여신상에 깃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벗어나고자 서구의 야만시기에 인류가 모색한 것이 바로 ‘물질에 대한 영혼의 경외심’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는 차치하고 동북아의 패권을 차지했었던 우리나라만 살펴보겠습니다. 석기, 청동기, 철기 등 문명의 전환점에서 선두를 유지해 왔었던 것이 우리민족입니다. 식민사관이 이를 부정한다면 임진왜란 때 등장했던 거북선으로 짚어 보도록 하지요. 이 새로운 개념의 전함은 1,2차 세계대전 때 위력을 떨쳤던 잠수함에 비견되는 획기적인 무기였습니다.
비록 연안방어를 위해 건조된 전함이지만, 타국의 전략적 해안 요충지를 점령한 후 투입 한다면 침략전쟁을 뒷받침 해주는 막강한 패권무기가 됩니다. 혼까지 빚어낸 청자와 백자를 만들던 물질적 창의력이 서구처럼 내달렸다면, 결코 거북선 하나로 침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반도체로 융기하기 시작한 삼성과 줄기세포로 각광받고 있는 황우석 박사의 연구 성과는 산맥을 끊기 어려워 먼 길을 돌아가던 우리의 민족혼을 서구적 물질문명이 강압해 금기를 해제해 버린 결과입니다.
거북선과 백자를 만들었던 역사상 유례가 없는 500년 조선은 상위층인 선비들의 청백리 사상이 물질적 수요를 감소시켜 얻어진 결과입니다. 조선이 다른 나라와 달리 외침을 자제할 수 있었던 것은, 끝없이 폭증하는 권력의 물질욕구를 이렇듯 무난히 소화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선도 말기에 횡행한 집권층의 물질적 욕망이 외세를 불러들여 망국으로 치달은 것을 보면,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권력이 가져야할 기본이 무엇인지 준엄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끝없는 욕망의 피라밋에 매장된 서구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숭고한 가치조차 물질적으로 재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유민주주의를 전쟁의 빌미로 삼은 물질민족은 끝없는 분란을 야기 시키려 합니다. 신의 뜻을 내세워 종말을 부둥켜 안은 채 구원까지 탐하는 기도도 잊지 않고서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려는 욕망은 신의 지위까지 탐하는 바벨탑을 만들게 됩니다. 하나였던 언어가 수천갈래로 나누어지듯 찢기워질 자국의 운명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광명개천(光明開天),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가 가지는 천지일합의 진리는 이 우주가 하나의 존재에서 나뉘어져 다시 하나가 된다는 윤회의 이치를 천부경을 통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하나에서 파생된 사람과 원숭이와 벌레가 다르지 않으며 나무와 산, 흙 또한 우리의 육신이 스러져 돌아가는 출발점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나무베기를 두려워하고 산허리 자르기를 기피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대부분의 동물을 같은 격으로 예우하며 공생을 모색한 불교의 커다란 근원이기도 합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윤회하는 하나의 단위로 개념할 수 있는 완성된 정신은 전생을 두려워합니다. 전생의 모자람을 현생의 노력으로 메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윤리는 현생의 잘못이 내세의 짐이 되는 것을 피하려 합니다. 정신적 가치를 우선할 수 있었던 기반입니다.
서구화가 덜 되었던 60년대까지만 해도 계산을 모르는 순박했던 우리의 정서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안타깝게도 현생을 중시하는 서구적 가치가 휩쓸어버린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교시가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일에는 도가 있습니다. 몸가짐을 예의 경지로 승화시킨 유교의 법도가 있고 검을 움직이는 법을 터득하여 길을 닦아 놓기도 합니다. 이렇듯 영혼과 물질을 합일시킨 경지를 도라고 합니다. 그 도를 이어받아 후대에 계승하는 것이 단절된 전통을 되살리는 길입니다.
우리민족이 가야 하는 길은 우주만물과 영혼이 합일된 재세이화입니다. 바로 물질문명을 넘어서서 내세에 이어질 영혼을 완성했던 조상들의 숭고한 뜻입니다. 그 절대의지가 바로 우리의 영혼에 담겨져 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시끄러운 생각들을 놓아버리면 시공을 초월한 아주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요? 추측입니다만, 그래도 약간의 체험은 있었습니다. 마음이 아프다거나 양심이 찔린다거나 사랑의 기쁨을 느끼는 곳이 바로 영혼입니다. 사랑을 잃었을 때 구멍이 뚫리는 곳, 의지가 가로막혔을 때 답답해지는 곳이 영혼입니다. 왼쪽 가슴 바로 아래가 그 곳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람의 영혼 위에 뛰놀고 있는 심장으로 완성됩니다. 영혼의 반석으로 물질의 십자가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무엇 때문에 부활을 통해 성령으로 흩어지며 사람들의 영혼이 되고자 했을까요? 그것도 물질문명에 속박당한 사람들의 터전에서 말입니다. 왜 다른 세계에는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하지 않았을 까요? 그분께서 보시기에 구원이 필요한 유일한 곳이 물질민족인 유대가 흩어져 살아갈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완성되어 물질욕구를 다스리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독생자의 구원이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나 기독교가 믿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성을 부정하시는 분들께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종교란 인간 수용체가 받아들이고 계승해온 가치추구의 결정입니다. 사람 죽이는 검에도 영혼이 깃든 도가 있듯이 사람이 믿는 종교에도 영혼이 스며들어 녹아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종교가 매개한 영혼들이 거대한 지력을 발휘한 것이라면 부활의 진위여부를 떠나 이치 합당한 부분에는 예의를 갖추는 것이 또한 사람의 도라는 것입니다.
서구화에 의한 물질문명의 확산은 분명 천주교와 기독교의 영혼구원적 활동이 필요할 겁니다. 다만, 종교 또한 물질의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일 바에는 지고지선의 역할을 해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속해있는 물질계의 과학적 이치와 영혼계의 종교적 의미를 동시에 설파한 천부경으로 해법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 하나에서 비롯되었으니 그 다른 각각의 하나가 이를 깨달아 상쟁을 종식하는 공존으로 제세이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의 절대의지라는 것을 인류공통의 가치로 공유해 제 종교가 매몰된 물질을 거두어 내는 것이 우리민족에게 주어진 역할입니다.
줄기세포를 이용해 난치병을 치료하려는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각 종교들이 윤리를 내세워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경청할 만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듯 합니다. 하지만, 물질로 교세를 세운 종교들이 영혼에 해당하는 윤리에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이 어딘지 어색해 보입니다.
어차피 인류가 내딛은 발이라면,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라면 인류공존을 지켜야 할 탈선민한 영혼민족이 앞서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핵을 보유한 물질민족의 배타적 행태가 생명공학 분야까지 점령하게 놓아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구를 생명체로 개념해 가이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뭇 생명체들이 세운 거대한 신전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요. 그 신전의 지붕위에 얹는 쐐기돌이 세계의 모든 힘이 충돌하고 있는 한반도입니다. 우리민족이 영혼의 가치를 간직한 채 이곳에 머물고 있었던 이유가 현생인류의 공멸을 막고자 하는 하늘의 뜻이라고 헤아려 봅니다. 우리의 가치를 시공의 제약 없이 전 세계로 전파할 수 있는 인터넷이 그 의지중 하나이고, 전인미답의 완성된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는 진통이 또 하나이며, 북핵으로 맞물리는 쐐기돌의 구도가 완성되려는 것이 나머지 하나입니다.
앞으로 나아갈 인류의 가치는 전 세계의 군사력과 문화와 종교가 경제교역 중심지가 될 한반도에서 융합되어 탄생해야 합니다. 분리되어 충돌했던 영혼과 물질을 통합시키고 그 흐름을 조율하는 쐐기돌이 제자리를 찾는다면 공멸을 면한 현생인류가 우주로 뻗어 나가는데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주로 나가야 하는 물질적 확장을 제어하게 되어 가이아의 품에서 구원을 찾을 수도 있겠지요. 인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아직 지구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핵 선제공격을 운운하는 미국이 인류의 공적으로 전락하는 이유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가 미국의 이성을 깨워 인류종말의 대속제물로 스스로 전락하려는 어리석음을 버리는 길로 인도해 주기를 기도합니다.
ⓒ jb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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