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종류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과학문명의 시대이니 만큼 지금을 기준으로 과거와 미래의 민족주의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는 과도기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지만 이거저거 다 엿보이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민족주의와 미래의 민족주의를 보면 됩니다.
신화적 민족주의
가장 오래된 것이 민족주의 입니다. 인간영역 밖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세웠습니다. 일종의 신격화죠. 다른 민족과 달리 신성을 가졌다는 차별화 입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져 나타나는데요. 자기자신을 넘어서는 힘에 기댑니다. 일종의 초능력을 추구하게 되어 추종대상의 신성불가침을 방패로 삼습니다.
그래서 신화적 민족주의는 불안정 합니다. 내부의 힘이 없을때 사대주의로 빠지거나 신(하나님, 부처님)을 앞세웁니다. 사실은 그 뒤로 숨는거죠.
부처를 신으로 만들어 내세우는 사람, 예지적 초능력을 추구하며 도를 닦는 사람, 북한핵을 구세주로 여기는 사람들은 모두 신화적 민족주의자 입니다.
자기 민족만을, 자신만을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패권주의, 배타주의로 가게됩니다. 그럴 힘이 없으면 사대주의로 방향을 돌리는게 일반적입니다.
반미세력이 소련해체후 대거 친미로 전향했던 의식 밑바닥에 이런 속성이 작동했습니다. 북한핵이 밀린다 싶으면 슬그머니 미국만세를 부르게 되죠.
허구적 차별화인 신화적 민족주의는 구호적 정체성을 용인합니다. 떠드는 것으로 행세하는 기회주의 무리의 요람인 것이죠. 실패한 민족주의 입니다.
도(道)란 무엇인가?
도를 닦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에서 많이 얘기하는 말이죠. 속세에서는 길을 닦는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같은 의미인데 다른 길을 가는 두 단어죠.
이렇게 얘기하면 좀어려우니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길을 닦는다는 말보다는 길을 낸다는 말이 더 이해하기 쉬울것 같습니다. 길을 만든다는 뜻이죠.
길을 만든다는 것은 계획적으로 건설하는 의미고, 길을 낸다는 것은 일단 가본다는 의미죠. 길을 닦는다는 것은 일상적으로 오고 간다는 뜻입니다.
물건을 오래 닦다보면 빛이나듯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은 잡초한포기 나지 않습니다. 완전히 닦인 길인 셈이죠. 도를 닦는것은 이러한 것입니다.
그 길을 지나지 않은 사람은 길을 닦은게 아니듯 앎을 살지않는 사람은 도를 닦은게 아닙니다. 말로 길을 낸들 잡초가 사라지고 나무가 비켜주겠습니까?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앎이 만마디라도 한걸음만 못한겁니다. 발없는 말이 달려봐야 귓속에 맴돌지 잡념을 없애줄리가 있겠습니까?
도를 알려준다는 말 자체가 잡음입니다. 여러사람이 지나가면 저절로 그 길을 가는게 사람입니다. 부처의 길을 가는 사람이 적으니 길이 안나죠.
떠들고 앉아있을 시간에 산책이라도 했으면 그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의 발자취가 부처대로를 만들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왜 부처길이 안보일까요?
부처혼자 지나간후 아주 드물게 따라가는 이만 있으니 잡초에 덮이고 숲에 가려진 것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은 아주 간단합니다. 어려울게 없습니다.
그의 수도고행이 길을 낸 것이기 때문에 발로 뒤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부처가 걸음으로 보여주었듯 뒤따라 걷기만 해도 부처의 가르침이 퍼집니다.
헌데 이미 나있는 길을 만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처를 부정하는 짓인데 되려 진정한 믿음이라 우깁니다. 따라 걷는데 정해진 방법이 있을까요?
아기는 종종걸음일 것이고, 안짱다리는 어기적 걸을 것이고, 팔자걸음도 있을수 밖에 없습니다. 제 생긴 제 위치에서 따라 걸으면 다 부처인 것입니다.
부처를 사람과 분리시키는 그순간 신화적 민족주의 비스무리한 신화적 종교가 되어버립니다. 사람일진대 어찌 신을 만들어 아닌사람 만드나요?
사람이 부처가 된 것이니 무의식적으로라도 그 길을 따라가면 부처인 것이지 신따로가 아닙니다. 다만, 차이가 있어 누구나 부처가 될수는 없겠죠.
스스로 부처 버금가지 못한다면 그냥 따라 걷는 것으로 만족하면 됩니다. 모두 다른게 사람인데 전부 부처빵 만들어 무엇에 쓰겠습니까? 과욕입니다.
부처의 인식을 제꺼로 탐내다 보니 도를 닦네마네 하는 것이죠. 세상사 다 알아 부처반열에 오른들 밥세끼 거르고 하늘에서 이슬만 마실수 있겠습니까?
다보고 다 알고 초능력을 가지게 된다해도 분초를 사는게 사람입니다. 달라지는게 없습니다. 도를 앉아서 닦다보니 특별한 미지를 동경하는 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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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길을 가면 돌에 걸리고 흙먼지도 날리는 별다르지 않은 세상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폐지줍는 부처가 많은 것이죠. 닦지않고 걸은 사람들입니다.
부처의 길을 가고 있는데 그게 부처의 길인지도 모르는 경지... 이것이 진정한 도인들의 풍모입니다. 그래서 말이 없지만 자체로 가르침을 줍니다.
길을가면 널린게 부처요 도인인데 걸상에 앉아 책파며 소리지른들 누가 거들떠 보겠습니까? 부모의 삶이 가르침이듯 부처의 가르침도 참되야 합니다.
과학적 민족주의
신화적 민족주의와 정반대죠. 자존을 세우되 현실에 서고, 민족을 생각하되 인류를 품는 것이 과학적 민족주의 입니다. 그래서 반민족도 품을수 있죠.
미국의 패권전횡을 비판하지만 그 현실적 힘을 인정합니다. 중국의 미국 뒤따르기를 비판하나 존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성주의요 과학인 것이죠.
이러한 현실인식으로 자존을 추구하는 것을 과학적 민족주의라 합니다. 수구보수들을 통일로 가는 예비 동반자로 생각하지 청산하려 하지 않습니다.
배타성을 버리고 이성적 인류애를 갖추었는데 기회도 주지않고 청산부터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청산론자들은 신화적 민족주의가 되는 것이죠.
부처의 대자대비심과 같은 과학적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 실천이지 내세움이 없습니다. 자존이 철저해 남에게 신경쓰는 자존심이 필요없는 경지죠.
부처가 길을 가듯 현실을 걷습니다. 떠드는 나라, 떠드는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때쯤 저만치 앞서있을 과학적 민족주의 입니다. 실용주의기도 하죠.
그렇게 인류에게 길을 보여주면 부처를 따르듯 다른 민족들도 떠들기를 멈추고 걷기 시작할 겁니다. 인류절반을 포기하는 전쟁보다 나은 길입니다.
다만, 인류절반을 품고 반민족 절반을 품고 가지만 나머지 생불 절반이 지칠경우 대자대비는 없습니다. 반과학적 민족주의는 과거로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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