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와 유권자
연속극을 보면 극단의 대립구조로 시청율을 올리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시청율이 올라가야 광고가 들어오고 그래야 방송국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초가 되는 것이 악역이지요.
선하디 선한 주인공은 끊임없는 신호를 시청자의 뇌리에 주입합니다. 쟤는 나쁜놈 이예요. 저와 비교해 주세요. 저는 참을만큼 참으렵니다. 그러나 한계에 이르면 어쩔수 없이 저놈을 박살내 버릴겁니다. 그래도 저는 착한 사람입니다.
저는 코웃음을 치지요. 그 반전의 기교가 시청자의 의식을 무장해제 시켜 자본의 배를 불려주는 첨병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의 역할이 그러합니다. 나름대로 무장된 시청자의 이성을 가로막아 광고가 들어갈 틈새를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이러한 술책이 가장 맹위를 떨치고 있는 곳이 정치판입니다. 하루도 안싸우는 날이 없지요. 그런데도 누구 칼맞아 죽었다는 소리는 못들었습니다. 어제 죽었던 연기자가 오늘 버젓이 다른 연속극에 등장하는 것과 흡사하지요.
철천지 원수가 되어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칼을 휘두르던 연기자들이 다정하게 서로를 칭찬하며 동료의 우애를 다지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 이더군요. 다만, 그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데 시청자나 유권자들은 종종 착각을 합니다. 보여주는 연출과 실제를 혼돈해서 주인공에게는 무한한 애정을 주고 악역에게는 저주를 퍼붓습니다. 이게 합당한 행동일까요?
물론, 개중에는 본성이 말종인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연기자에게 주어진 역할, 정치인에게 주어진 역할은 해당 개인의 본성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연기자는 연기력으로 정치인은 정치력으로 우선 평가한 후 나머지를 보아야 합니다.
여야 각 정당과 정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매체의 논리를 보면 악역 연기자를 위협하던 일부 시청자의 광기가 떠오릅니다. 서로 자기진영 정치인이 선이요 상대방 정치인이 악이라며 싸우는 것도 이들과 다르지 않은것 같은데요.
연속극을 보던 시청자가 브라운관으로 뛰어들어가 악역을 응징하려고 하는 정체성 망각의 자기가상화나 유권자라는 결정권을 헌납하고 정치진영의 손발이 되어버린 추종자들의 자발적 정체성 상실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미디어가 생산해 내는 정체성 가상화 못지 않게 정치가 생산해 내는 유권자 허깨비 만들기의 병폐는 개인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갉아먹고 있습니다. 스스로 존엄한 주체인지 아니면 자본민주주의의 헛점을 키워가는 일개미인지 생각해 볼때입니다.
유일한 명분은 차별화된 당면정책
열린당의 분당 움직임 부터 대통령의 민주평통 자문회의 발언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정치공학적 숫자판 입니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야당들의 움직임도 더 높은 숫자를 누르기 위한 다툼일 뿐이고요.
여당의 분열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두 부류의 세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분당을 반대하는 열린당 사수파들이고 다른 하나는 한나라당입니다. 불감청 고소원가를 불러대던 한나라가 꺼림직해 한다는 것이 좀 의외죠.
여당 사수파들도 웬만하면 전당대회를 3월 이후로 미루려고 하더군요. 도대체 3월이 어떠한 상징성을 가지기에 시기를 두고 다투고 있을까요? 아무리 찾아 보아도 내년 3월 시한으로 추진하는 한미 FTA 밖에 없더군요.
우리가 알고있는 정치 카르텔은 한미 FTA에 대해서 암묵적 울타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 울타리가 바로 정당이라는 테두리죠. 그 속에 반대론자들을 가두어 놓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열린당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반대론자들을 최소 내년 3월까지만 묶어 놓으면 한미 FTA를 정치적 반대에 부딪히지 않고 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지요.
만약, 열린당이 분열되어 FTA에 반대하는 당론 의결이 가능한 상황이 되면 지금까지의 조용한 물밑 작업은 물거품이 될 공산이 큽니다. 그렇게 국민의 여론을 등에 업고 반FTA에 나서는 신생정당은 단숨에 한나라를 추월할 수 있을겁니다.
결국 한미 FTA 협상이 3월을 넘기게 된다면 이것은 다가오는 대선의 가장 중요한 공약으로 대두될 겁니다. 북핵에 의한 안보나 수구개혁으로 구분하는 진영논리는 끼어들 자리가 없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당의 재집권논리를 대거 양산하고 있는 논객들을 바라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해온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왜 기를쓰고 외면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말못할 사연이 있는 것이로 구나...
정부와 열린당 일부와 한나라당이 암묵적으로 공조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면적 대연정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벌어지고 있는 분당사태를 날카롭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약, 조급한 한미 FTA 반대를 기치로 내걸지 못한다면 분당세력이 내세울 명분이 전혀 없다고 평가해도 됩니다. 그것도 3월 이전에 단행하지 못한다면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패싸움 정치에 불과할 것입니다.
한미 FTA의 체결 필요성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정치권이 보여주는 작태를 보니 협정체결 이후 안방을 내어줄 가능성이 농후하군요. 믿을만한 충정이라면 모르되 삼류정치에 곳간 열쇠를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차라리 시한을 미루더라도 한국 내부의 정치를 제대로 세운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미국 또한 소극적 자세로 일관하는 일본이나 잠재적 경쟁국으로 견제하고 있는 중국과의 FTA 추진이 그리 쉽지는 않을것입니다.
따라서 조급함을 버리고 우리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부분들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후 민의에 의해서 결정을 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정책실행 방법입니다.
북핵특검도 그러한 취지에서 받아들였다고 했으니 만큼 통치차원의 독단은 없었으면 합니다. 이제 대통령의 말은 들을만큼 들었지요? 지금부터는 실행을 하는지 지켜볼 일입니다.
국민들이 왜 불안해 하겠습니까? 한미 FTA가 조삼모사(朝三暮四)인지 조삼모사(朝三暮死)인지 알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명운을 거는 일입니다. 결과가 어찌 나오든 민의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이 순리인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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