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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현실적 통일의 길

정의의 역설

손바닥 위의 정의

 

우리는 믿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정의라는 것을 믿죠. 그냥 믿는 것 뿐입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그 실체, 실제를 모른채 믿으라니 믿고 믿고싶어 믿습니다.

 

정의는 부처님 손바닥 위에 있는 손오공입니다. 열심히 하는데 결과는 부처님 손바닥에 놓이게 되죠. 즉, 정의라는 것은 주재자의 이익 도구인 것입니다.

 

4.19희생으로 이승만을 쫓아내자 5.16군사정변, 6.29로 군사정권을 끝내자 신자유주의 경제독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학혁명은 일제를 초대했죠.

 

반공이념으로 6.25전쟁도 치루었습니다. 그러나 손해만 봤죠. 미국, 일본등만 이익을 챙겼습니다. 정신적 승리가 정의라면 모르되 반성할 부분입니다.

 

한국같은 약소국은 자본주의 체제 손바닥 위에서 그 이익을 위해 춤추는 손오공입니다. 이것을 부정하고 사람입네 정의를 외치는 것은 허영입니다.

 

아무리 목숨바쳐 헌신을 해도 여러분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자본주의 체제이익에 부역할 뿐입니다. 선거투표, 지역감정, 반북까지 우리이익은 없습니다.

 

부르투스와 유다

 

모든 사람은 폭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폭력성이 강한 사람 약한 사람이 있고, 절대다수는 상황이 결정합니다. 이 절대다수가 부처님 손바닥을 만듭니다.

 

앞서지 않고 소심한것 같은데 따돌림에 가담하고 전장에서 총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절대다수는 상황에 따라갑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죠.

 

흔히 인물, 영웅주의에 빠져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사람, 집단을 쳐다봅니다. 그러나 상황을 만들거나 반대하며 방향을 제시할뿐 역사의 실체는 아닙니다.

 

역사를 만들고 결정하는 실체는 상황에 따라가는 절대다수죠. 그들이 주체고 결정력입니다. 수동적 방향성 때문에 늘 선전선동에 휩쓸립니다.

 

그 선전선동이 절대다수에 이익인가 아닌가로 평가해야 하는데 선전선동 당하는 대중은 그걸 판단할 여유가 없죠. 상황에 떠밀려야 움직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국가적 예속성, 절대다수의 수동성 때문에 정치권이 선전선동을 해도 미국의 이익, 진보좌파가 선전선동을 해도 미국의 이익이 됩니다.

 

경제, 군사적으로 미국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정의감으로 반미에 앞상선 사람은 절대다수의 부르투스를 만나게 됩니다.

 

반미로 인한 경제, 군사적 불이익이 피부에 닿으면 절대다수는 반미 선전선동에 칼을 꽂습니다. 관념상의 정의가 현실에서 처절하게 무너지죠.

 

정의감만 앞세워 세상을 끌고가려는 사람은 어느시대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지죠. 희생자만 만드는데요. 진짜 정의는 현실적 승리지 정신이 아닙니다.

 

절대다수도 정의를 따라가지만 유다를 만나게 됩니다. 권력을 쥐게된 선전선동 세력이 절대다수를 모른다고 외칩니다. 기득권이 되어 버리죠.

 

정의는 관념일 뿐이다

 

현실은 정의가 아닙니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죠. 옳고 그름이 현실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치열한 이익다툼과 나눔이 현실을 만드는 겁니다.

 

다툼이 많은 사회도 있고 나눔이 많은 사회도 있습니다. 다툼이 많은 사회에 나눔을 실천하라 할수 있을까요? 나눔이 많은 사회에 다투라는 말과 같습니다.

 

다툼이 많은 사회는 약육강식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싸우지 말라는 정의는 포식자에게 굶어 도태되라, 약자에게 잡아먹히라는 주문일 뿐입니다.

 

세계를 봅시다. 미국에게 패권을 버리고 착하게 살라고 할수 있을까요? 이미 패권을 펼쳐놓아 그 무력을 접는 순간 곳곳에서 보복공격을 받게됩니다.

 

약소국에게 착하게 현재의 국제법을 지키라고, 그것이 정의라고 떠들수 있겠습니까? 핵무장을 넘보지 말고 불공정 교역질서를 지키라 말하는 게 정의일까요?

 

미국에게 정의(?)를 지키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보수(북한 비핵화)와 진보좌파(착한미국)입니다. 북한에게 정의를 준수하라는 요구도 하고있죠.

 

정의라는 관념에 빠져 비현실적 요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의의 역설이죠. 관념속 정의가 현실에선 정의가 아닌 나비의 꿈속에 한국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외치는 자가 그어떤 나라보다 많지만 실천가는 거의 없는 비현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주장과 행동이 따로노는 모범적 사례죠.

 

따라서 앞장서지 않는 것이 관념을 탈출하는 방법입니다. 선전선동할 필요도 없고 희생할 이유도 없습니다. 되도록 자기자리에서 홀로가는 것이 좋습니다.

 

뜻으로 뭉치다 보면 조직관성이 생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건물을 세운후 계속 관리해야 유지가 되듯 한번 만들면 얽매이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조직관리, 유지가 현실이 되고,, 뜻은 멀어집니다. 한국의 정당변천사를 살펴보면 바로 이러한 속성으로 이어져온 것을 발견합니다.

 

뭉치면 변절하고 흩어지면 뜻이라도 유지할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왜 정당, 기성 정치세력이 지지를 요구하겠습니까? 변절하라는 주문입니다.

 

정당, 정치인을 지지하고 추종하는 관념노예가 있어야 현실과 따로노는 막장정치 장사를 계속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 한국정치 > 국민 이렇습니다.

 

국민들이 선전선동에 움직여 줘야 한국정치가 이익을 보고 그래야 미국의 이익이 더 커집니다. 야당의 공격으로 정권이 위태로우면 미국 무기부터 사줍니다.

 

미국을 등에 업으면 절대다수는 멈춥니다. 때문에 미국은 한국정치의 갈등구조로 더큰 이익을 얻게됩니다. 이 현실구조를 알아야 행동을 가리게 되죠.

 

단순무식하게 정권교체, 타도미국을 외쳐봐야 독재, 미국의 이익에 앞장서줄 뿐입니다. 천하에 없는 관념전지자라고 해도 현실맹이면 노예일 뿐입니다.

 

노예는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지지 못하죠. 적에대한 공격으로 적을 이롭게 하는 소크라테스 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돼지가 현명할수 밖에 없는 것이죠.

 

가만히 있는 국민을 비웃는 진보좌파의 관념적 정의는 현실적 정의가 아닙니다. 총탄이 쏟아지는 상황이 오면 진보좌파를 찾아볼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가만히 있던 절대다수가 난국을 헤쳐나가겠지요. 언행이란 시차가 없는 것이 최고죠. 행동으로 말하는 사람은 눈으로 들어야 알아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눈으로 글을보면 안됩니다. 그 움직이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글의 발자욱 소리를 들을수 있을때 우리는 관념이 아닌 현실을 만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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