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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현실적 통일의 길

싸움의 법칙으로 보는 투쟁론의 소아적 한계성

싸움에도 방법이 있죠. 그중 가장 이기기 좋은 공식을 만들어 놓으면 백전백승입니다. 이걸 싸움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전략전술이라 복잡하게 말하기도 하죠.

 

바둑, 장기 싸움에서 이기는 최고의 방법은 상대가 한수둘때 세수, 다섯수를 두는 겁니다. 하지만 누구나 반칙을 알아차립니다. 싸움에 응하려 하지 않죠.

 

헌데 이런 싸움이 수백년 동안 벌어지고 있습니다. 희안한 것은 반칙이라는 것을 모른채 싸움에 응하고, 이런 불공정 방식을 정의인양 착각해 찬양합니다.

 

정의의 가면을 쓴 반칙은 국제사회는 물론이고 우리 주변에서 늘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제질서 자체가 반칙을 장치한 불공정 도가니라 우리도 영향을 받습니다.

 

인권, 민주주의, 환경, 자본의 자유, 여성의 권리, 종교의 자유... 이것들이 제각각으로 보이고 군사적 공격과 무관하게 보이면 싸움의 법칙을 모르는 겁니다.

 

군사적 경기장에 두 나라가 있습니다. 을이라는 나라는 선수단만 출전하고,, 갑이라는 나라는 관중, 심판, 의사, 중계해설자, 응원단등 경기장 전체를 동원합니다.

 

을나라 투수가 강속구를 던지며 갑나라 타자를 압도하면 갖은 핑계를 동원해서 강판시키죠. 을나라 타자가 홈런을 치면 약물을 복용했다며 무효화 시킵니다.

 

이달 일본이 주최한 세계야구 경기에서 편파판정 시비가 있었습니다. 새발의 피죠. 국제사회의 전쟁다툼은 더할수 없이 치사한 방법들이 총동원 됩니다.

 

국가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죠. 한국의 인터넷이 증명합니다. 반대의견에 조직적으로 달려들어 감정공격, 인신공격, 논리공격 역할을 나누어 싸웁니다.

 

국제질서 > 국제경기 > 국내질서 > 국내경기... 이러한 종속구조가 만들어 내는 일관된 현상입니다. 이런 행동방식 위에 정의의 깃발이 난무하는 것이죠.

 

문명적 수준에서 훨씬 앞서있던 동양이 서양에 무릎을 꿇게된 결정적인 원인이 바로 현질서가 보여주고 있는 싸움의 법칙 때문이었습니다.

 

이법칙을 알아차리지 못한것이 패인입니다. 왜 못보았는가? 눈에 보이지 않거든요. 시공간 제약을 넘어 최고의 속도로 넘나들고 있는 법칙을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자본입니다. 자본의 힘은 세계대전의 승패를 결정할 정도로 파괴적입니다. 인적, 물적 동원력을 가진 보이지 않는 흐름은 세계패권을 좌우할 정도죠.

 

중국이 영국과 아편전쟁을 할때 자본은 유럽과 일본등을 넘나들며 전장을 지휘했습니다. 중국이 한수를 두는 동안 자본이 서너수를 더두며 우위를 점한거죠.

 

중국투수가 혼자 공을 던지는데 타석에 영국, 프랑스, 일본등 여러명의 타자가 동시에 방망이를 휘둘렀죠. 자본은 서너수를 더 창출할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연합국, 나찌 독일 양쪽과 거래를 하며 이익을 챙겼다는 의혹까지 있습니다. 전쟁을 장사거리로 삼은 것이죠. 자본은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사상이념도 없고 국경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익이 있는 곳으로 물같이 스며들죠. 공기처럼 잠입합니다. 그 물을 마시고 공기를 들이쉰 사람들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피아식별이 안되죠. 어제의 적이 동지가 되고 나라가 부서집니다. 화생방 무기처럼 치명적입니다. 국제사회의 화생방 공격이 바로 자본인 것이죠.

 

이 자본이 인권, 민주주의, 환경, 여성의 권리, 종교의 자유에 스며들어 사회를 사분오열 시킵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본 자체의 무한한 초법적 자유를 요구합니다.

 

최근 중국의 소수민족, 러시아의 시민단체에 개입해 색깔혁명을 조장하고, 대선에 개입해 푸틴의 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시리아 내전도 자본이 조장한거죠.

 

미국을 중심으로 전세계의 자본이 기회를 향해 움직이는 현상이 색깔혁명, 내전등 간접적인 문제를 만듭니다. 군사력을 투입해 직접적인 전쟁도 일으킵니다.

 

미국 국무부의 공식적인 대외정책 자금, CIA의 음성적 공작자금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또한, 친미기업들이 현지영향력을 활용해 거들기도 하죠.

 

이러한 질서주관자들이 한국의 인터넷을 실험장소로 주목할게 뻔하죠. 한국에서 실험한 결과를 전세계 온라인 전장에 써먹을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황우석, 미친소등 촛불시위때 온갖 선전선동이 난무했던 것입니다. 약간의 개입으로 사건사고를 증폭시켜 핵폭발을 일으킨 것이죠.

 

그후엔 연쇄폭발이 일어나 알아서 작동합니다. 자본은 핵기폭 장치만 완성시켜 주고 손뗄수 있게되었죠. 역사교과서 국정화도 그런 먹이감중 하나입니다.

 

순수한 시위참여가 자본의 이익을 만들어 주는 사회... 자본주의 국가의 속성입니다. 숭고한 희생이 자본의 이익기회를 키워주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죠.

 

전체국면인 싸움의 법칙을 깨닫지 못한 투쟁론이 가지는 소아적 한계성입니다. 적과 싸우면 싸울수록, 치열하게 항쟁하면 할수록 상대의 이익만 커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의 속성을 제대로 되받아친 나라가 있습니다. 인권, 민주주의, 환경, 자본의 자유, 여성의 권리, 종교의 자유와 전쟁을 한덩어리로 만들었죠.

 

바로 북한입니다. 미국과 남한이 요구하는 개방과 인권을 평화협정 하나로 묶어버린 것입니다. 대여섯수 더두며 유리하게 싸우려는 한미일의 꼼수를 안거죠.

 

미국의 북한 비핵화는 인권, 민주주의, 환경, 자본의 자유, 여성의 권리, 종교의 자유를 실행한후 관계를 개선하자는 소리죠. 북한을 공격하겠다는 뜻입니다.

 

반면 관계개선을 한후 인권, 민주주의, 환경, 자본의 자유, 여성의 권리, 종교의 자유를 실행하겠다는 것이 북한의 요구입니다. 불공적 경쟁은 사양한다는 것이죠.

 

미국경제가 침체되어 가고, 군사력이 찌그러지기 시작한 것과 달리 북한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불공정 경쟁을 거부한 효과인 것입니다.

 

불공정 경쟁을 받아들인 나라는 거의다 무너졌습니다. 소련이 해체되었고 리비아가 무너졌습니다. 북한에게 불공정 경쟁을 권유했던 카다피도 최후를 맞았죠.

 

미국이 약속을 했지만 프랑스등이 리비아를 공격했습니다. 즉, 약속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공격이 상존하는 것이 자본주의 질서의 국제적 관례인 것이죠.

 

북한이 미국과의 약속을 믿고 핵포기를 했을때 남한 또는 일본이 공격을 하는 식이죠. 그래서 핵(힘, 정당성)을 버리면 먹이감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토론, 집회시위 또한 같습니다. 국민의 힘이라 할수있는 합법성, 정당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강경폭력시위, 적당한 타협은 자멸수일 뿐입니다.

 

불공정 싸움터로 걸어들어 가는 것이죠. 스스로 선택한 것 같지만 차분하게 살피면 교묘하게 상황을 조장한 정체불명의 선전선동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간단하게 알아볼수 있죠. 복면을 쓰거나 인터넷 익명성 뒤에서 선동을 하죠. 네가 앞장서 보아라 하면 뒷꽁무니를 뺍니다. 서너명씩 무리지어 다닙니다.

 

이러한 형태의 움직임이 바로 핵기폭 장치를 완성시켜 놓는 것이죠. 그러면 스스로 작동하며 희생을 만들어 자멸내파되기 시작합니다.

 

자본이 만들어 낸 질서는 싸움의 법칙에 철두철미합니다. 이기본을 모른채 숭고한 진정성 하나로 싸웠던 것이 동학, 항일투쟁~오늘의 민주화 투쟁입니다.

 

결과는 우리모두 알고있는 그대로 입니다. 수백만이 희생되었고 분단의 아픔까지 떠안아야 했죠. 우리민족이 자본주의 싸움의 법칙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본주의 질서가 육성한 지금의 정치기득권 및 지식인들은 싸움의 법칙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죠. 국민들을 가지고 놉니다.

 

항상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정치인, 지식인들은 뒤에서 선동하고 국민들이, 선동당하는 행동가들만 희생되기 시작했을까? 그래서 좌우지식인을 분석했습니다.

 

몇몇 사이트에서 그들의 생각을 찔러보고 반응을 살폈죠. 역시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파생품이더군요. 그들의 선동성 주장, 기득권 옹호론은 이타적이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죠. 자본주의 질서에서 얻어지는 이익을 깨버리지 못하고 싸움의 법칙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외부를 위한 지식일 뿐이죠.

 

인권, 민주주의, 환경, 자본의 자유, 여성의 권리, 종교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을 믿을수 있을까요? 이들에게 정의란 무잇일까요? 수단방법 안가리는 목적추구?

 

민족을 말하지 않고 통일을 바라지 않으며 불공정의 극치인 싸움의 법칙에 충실한 사람들은 사대적 이타심이 강합니다. 지식의 뿌리가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교과서 시위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위를 조장선동 했던 새민련은 여전히 당권다툼에 정신이 없습니다. 백남기씨의 희생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인권, 민주주의, 환경, 자본의 자유, 여성의 권리, 종교의 자유는 국민을 위하지 않습니다. 국민을 위한다고 해도 실제 국민의 불이익만 초래하죠.

 

우물에서 숭늉 찾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 민주화가 되긴 한걸까요? 공안의 인적감시가 없으면 민주주의?

 

아날로그 전화, 말, 우편으로 정보가 오고갈때는 공안이 현장에 나가 미행감시를 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디지탈화 된 이후 인적 감시통제가 사라졌죠.

 

음성통화, 문자대화, 이메일, 인터넷 글게시등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분류저장할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방위 감시통제가 가능해진 것이죠.

 

그래서 인적 감시통제가 사라진 것이고, 전방위 감시가 가능하다는 것을 숨겼죠. 국민들의 정보소통량이 많아져야 그림자 감시통제 효과가 커지니까요.

 

한때 카톡사찰에 놀라 인터넷 망명이 유행했습니다. 공개할수 없는 수위의 대화가 오갔던 사람들이 특히 놀랐을 겁니다. 사생활 약점이 축적감시되는 것이죠.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 조차 모르는 감시체제는 떠들면 떠들수록 자기를 공격하는 자충수를 만듭니다. 이게 민주주의 일까요? 민주주의는 퇴보해 사라졌습니다.

 

인터넷에서 민주화, 정의, 개혁, 혁명을 떠드는 것은 더이상 옛날의 투쟁이 아닙니다. 떠들며 전파할수록 블랙리스트만 배불려 줍니다. 자발적 밀고죠.

 

아직도 투쟁론을 설파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이 옛날옛적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느냐고... 시대착오적 투쟁론은 소아적 오판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