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일이 세상공부인 경우 특히, 발로 걸으며 땀흘려 보고 듣는 공부는 그자체로 현실입니다. 현장으로 들어가면 겉에서 볼수없는 진짜를 만납니다.
일반인들이 접근할수 없는 다종다양한 현장을 드나들수 있는 직업은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도구입니다. 남자라면 욕심내 볼만 합니다.
직업을 이해하려면 그 사무실, 작업현장에 들어가면 되고,, 사람의 내면까지 보려면 사는 집, 장소에 들어가 보면 됩니다. 현실현장에 증거자료가 있으니까요.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깨달은 것은 직업, 혈연, 학연, 지연적 특성과 개인적 인성의 불일치였습니다. 관념적 일반화의 어리석음을 현실이 말해준 것입니다.
군사독재가 있었지만 모든 군인이 국민에게 총칼을 겨눈 것은 아니었고, 경찰의 부조리가 있었지만 치안을 유지한 순기능이 있었습니다. 명암이 있는 것이죠.
빛만 있거나 그림자만 있는 경우는 절대 없습니다. 명이나 암을 절대화 시키는 것은 관념의 신앙입니다. 그렇게 보고싶어 극단으로 몰아 일반화 시키는 광기죠.
탈북자들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중 자칭인지는 모르겠으나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극히 드물지만 진중한 인품을 가진 분들을 보게 되는데요.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외국으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북한 주장대로 탈북자 다수가 그런 경우죠. 그러나 범죄자로 일반화 시킬수는 없습니다.
탈북자 중에도 균형잡힌 시각을 가진 분들이 계십니다. 분단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처지상 어쩔수 없이 남북대립에 나서게 되는 분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 표현은 안하지만 그분들의 그늘진 표정으로, 절제된 말씀으로, 가라앉은 눈빛으로 읽어낼수 있었습니다. 분단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가끔 술한잔 하면서 마음을 나누고 싶었지만 제가 쓴 글때문에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객관적이라 하나 체제도 비판하는 터라 탈북자들에게 귀코걸이기 때문입니다.
통일을 생각하면서, 북한의 입장도 알고 있지만 탈북자들도 품어갈수 없을지 늘 생각합니다. 일부러 거리를 두는 저처럼 상황에 떠밀려 멀어진 분들이 계시니까요.
세상과 사람은 이분법으로 일반화 할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선하기만한 사람은 극히 드물고, 악하기만한 사람 또한 많지 않습니다. 선악이 동시에 있습니다.
극소수지만 주체적 결정으로 절대자아를 유지하며 산 사람도 있을겁니다. 그러나 일신상의 완벽함에 불과할뿐 사회적 결함은 없을수 없습니다.
성장하면서 맺게되는 학연, 지연, 직업, 자신과 자식의 결혼에 의해 상대가문의 정체성과 연결됩니다. 직업에 충실하다 보면 고객, 거래처의 정체성과 연루되죠.
물건을 팔았는데 범죄에 쓰이고, 살려준 생명이 사람을 해하면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이렇게 비주체적인 상황을 피하려면 혼자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산속에 들어 간다고 해결될까요? 다른 사람들이 나라를 지키고 꾸려 나가는 것에 묻어가는 몰염치일 뿐입니다. 의무는 팽개치고 독존적 권리만 누리는 겁니다.
다른 사람, 다른 나라... 다르다는 뜻이죠. 그런데 같아야 한다는 강박증을 관념이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나 또한 다른 사람중 하나 입니다. 모두가 다르죠.
다른 사람들의 조화가 사회이고, 다른 어울림이 질서를 만듭니다. 다르다고 배척하면 관념의 산골짜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서 혼자살게 되죠.
실제 현실과 다르게 이야기 하고, 편가르기, 선전선동을 일삼는 무리들은 배격해야 하나,, 다르다고 인적청산을 해야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정치진영이 다르고, 출신 지역 및 체제가 다르다고 해도 통일이라는 민족의 숙원을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 그 다름은 얼마든지 인정하고 존중할수 있는 것입니다.
일부 탈북자 처럼 대놓고 통일을 말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일부 급진세력이 주장하는 인적청산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지역집단, 직업조직 소속이죠.
북한이 민족성원들에게 통일의 문을 열었습니다. 탈북자 또한 배제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입밖에 없는 남한의 일부 급진세력만이 인적청산을 주장합니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탈북자는 배신자죠. 친일파, 친미파와 동급일수 있습니다. 교조적으로 해석한다면 친일, 친미 세력이 구축한 자본주의도 청산대상이 됩니다.
남한 급진파들 논리대로 엄격하게 가면 자본주의에 물든 모든 사람이 청산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외없이 남한 급진파들도 청산대상에 들어가는 것이죠.
친일, 친미 세력은 통일에 협조할리도 없고, 협조해도 용서할수 없다는 논리는 자본주의 체제환경에 물든 이상 통일체제에 안맞고, 용인할수 없다는 논리를 낳습니다.
통일을 견인하는 힘이 남한에 없고, 남한 급진파가 보수기득권의 권력에 종속되어 있는데 입만 살아서 인적청산을 외치는 것은 김기종식 과일 칼부림입니다.
혁명을 주도하는 것이 지식인 이지만, 지식인의 종말이 혁명의 완성인 역사공식은 많은걸 생각하게 합니다. 현실에 벗어나 이상적 거품으로 질주하면 척살당합니다.
자본주의가 실물에서 벗어나 거품질로 망하고 있듯, 지식인 또한 현실에서 벗어난 거품질 때문에 토사구팽 당하는 것입니다. 관념의 함정입니다.
나만은 다르다거나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개인주의입니다. 사회구성원 으로서 집단으로 가지게 되는 책임을 모르기 때문에 떠드는 소리죠.
국가부채가 국민 전체의 빚이듯 국가사회의 명암은 전체구성원 공동의 것입니다. 친일, 친미, 분단, 통일에 있어 개인주의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이죠.
공공적인 정치, 역사를 말하면서 자신만은 예외라는 개인주의, 정당성 주장이 가능한가요? 모순입니다. 사회공동의 문제를 개인주의로 어떻게 해결합니까?
한국군대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었습니다. 그때 저지른 반인권적 전쟁범죄에서 자유로울수 있는, 열외될수 있는 한국인이 있을까요? 국가사회 공동의 문제죠.
관념논리로 일반화 시켜 선전선동을 해대는 사람들의 특징이 개인적 예외주의입니다. 지역, 진영, 민족으로 일반화 하면서도 자기는 열외시켜 정당화 합니다.
자기만 정당한듯 개한민국이라고 떠들어 댑니다. 누워서 침뱉는 거죠. 정의니 이상이니 하는 것은 관념입니다. 관념에 매몰되면 기본적인 공사구분 조차 못합니다.
모든 인간은 국가사회의 공적인 동시에 사적인 존재입니다. 사회공동의 문제에 있어 개인적 예외주의를 꺼내들면 모두가 자기정당화를 외치게 됩니다.
정당성을 다투느라 사분오열 되고, 힘센쪽이 이기게 됩니다. 독재전횡을 조장하는 것인데 민주주의를 떠드는 사람들이 예외주의에 빠져있다는 것이 모순인 겁니다.
다른 대상을 일반화 시키는 동시에 자신은 열외시키는 예외주의는 논리불륜입니다. 일반화 자체도 모순이고, 예외주의 자체도 모순이지만 둘을 합치면 더 모순이죠.
세상에 대한 현실적 이해가 깊지 않으면 우습게 보입니다. 머리속에 구겨넣어 간략하게 정리할수 있는 것이라 여기게 됩니다. 관념적 레고랜드가 완성되죠.
이리 쌓고 저리 쌓아도 뚝딱 만들어지기 때문에 자신감이 넘치죠. 논리블록들이 매끈해 빈틈이 없습니다. 아주 견고해 절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을 쌓습니다.
그러나 현실로 나오면 달라집니다. 일반화와 예외주의에 현실을 대입하면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현실세계의 동시성인 명암이 승수로 작용해 분열합니다.
관념적 완성도가 지나치게 높은 반면 현실적 이해도가 낮은 사람은 일반화와 예외주의에 기댄 경우가 많습니다. 이분법에 가까워 완벽한듯 보이나 실질이 없습니다.
디지탈식으로 좋고(0), 나쁘다(1)로 나누면 논리가 간략하고 그럴듯 합니다. 어떤 대상도 논리로 나눌수 있습니다. 0, 1로 무한정 나누어도 곧게 뻗어나갑니다.
그러나 어떤 0, 1과 다른 0,1을 이으면 논리부정이 발생합니다. 일반화(0), 예외주의(1)를 현실인 명(0), 암(1)과 연결하면 그 허구성이 드러나게 되죠.
명과 암은 같이 있지만 섞이지 않죠. 일반화와 예외주의도 섞이지 않습니다. 일반화가 성립되려면 예외가 없어야 하고, 예외가 없어야 일반화가 가능합니다.
현실에 있어 일반화(0) × 예외주의(1) = 모순(0)이지 참(1)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명암이 있습니다. 명만 있거나 암만 있는게 아니죠. 앞이 있으면 뒤도 있죠.
때문에 아날로그식 이치가 일관된 논리의 기본입니다. 하나의 이치로 전체를 꿰어가면 그 논리는 일관성을 유지할수 밖에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흐르죠.
어떤 사안을 대해도 자기모순을 배제할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항상 완전무결할수는 없을겁니다. 그러나 말하는 족족 모순을 뱉어내지는 않겠지요.
디지탈은 0, 1로 신호를 끊어서 전송합니다. 선행 논리와 후속 논리가 떨어져 있어 상호 모순검증이 불가능합니다. 말하는 그자신의 자기검증이 어렵죠.
아날로그식은 말하기 이전 단계에서 생각이 하나의 논리관문을 통과하기 때문에 즉각 걸러집니다. 자연스럽게 그냥 다기검증이 되는 셈입니다.
아날로그 방식인 하나의 논리관문 즉, 동양식 이치로 말하는가 아니면 디지탈 방식인 서양의 이분법으로 구성된 단절방식의 논리로 말하는 가...
이둘을 구분하면 아주쉽게 선전선동을 가려낼수 있습니다. 특히 선악구도, 정의등 감성적 수단까지 동원하는 글은 이분법을 배배꼬아 목적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사다리를 탈때 꽝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고 선택을 하게됩니다. 그런데 거꾸로 타면 누구든 꽝을 피할수 있죠. 거꾸로 읽으면 어떤 글이 꽝인지 쉽게 알수있습니다.
글이란 사다리식 뻗어가기라 읽는 사람의 생각을 몰고 가는지 안내하는지 역독법으로 간파할수 있는 것입니다. 관념을 현실로 꺼내는 방법이 바로 역독법 입니다.
서양식 이분법에 매몰되어 관념환상으로 현실계를 이탈한 세력이 있습니다. 자타칭 노빠들입니다. 이들의 자기정당화, 교묘한 논리는 그악스럽죠.
노빠보다 덜하지만 진보좌파들 또한 관념논리가 강합니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생각이 쉬워집니다. 못할게 없어 보이죠. 하룻강아지가 무서운게 없는 이유입니다.
현실을 모르거나 무시하다 보니 구호는 나라를 열번 만들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것이죠.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세력은 고립축소를 면치 못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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