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최후의 전장
세 장성은 협상장에서 돌아온 바로 그날 퇴역을 선언했다. 군의 기둥들이 갑작스럽게 물러나자 제국 국민들은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기업들의 텃밭에서 먹고살지만 그 터전을 지켜주는 것이 군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인간이란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조삼모사가 원숭이를 빗댓지만 그게 인간의 습성이다. 코앞의 이익이 내일에 걸린 목숨보다 크게 보이는 것이다. 한번도 아니고 연거퍼 대참패를 안겨준 우국과 평화협상을 시작하자 마자 버팀목들이 물러나는 모양새는 제국이 기우뚱 하는 착시를 일으켰다.
국민 전체에 위기감이 팽배해지기 시작했고 재고해 줄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언론을 채워갔다. 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야전사자들의 기질이 그러했고 정치로 뛰어들 시기를 기다리는 신중함이 국민들을 애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의원 입후보자 등록 마감 일주일을 앞두고 서류를 제출한 야전사자들이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상실감에 빠져있던 국민들은 세 장성의 화답에 열광했다. 어디든 상관 없었다. 그들이 평생 보여주었던 믿음직한 역할이 정치분야에서도 여전하면 되는 것이었다. 전쟁을 끝내자는 군인들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기성 정치계가 물불 안가리고 보여 주었던 무절제함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세 장성이었다. 이들이 나서자 개혁성향의 정치인들이 참여했고 뒤이어 재야단체까지 합세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모든 지역구에 후보를 내는 전국정당이 되었다. 정권을 넘어 구태정정치가 완전히 축출 당할수도 있는 변혁이 용틀임 하고 있었다.
우국은 이런 제국의 흐름에 가일수를 하기 시작했다. 직선장군의 일대기를 방송하며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앞장서서 지휘하다 최후를 맞은 진정한 군인이었다는 호평을 쏟아냈다. 직선장군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주검이 있는 우국에서 흘러나오며 제국 국민들의 이목을 끌어가고 있었다.
투표가 다음날로 다가오자 우국은 그렇게 증폭시킨 제국의 여론에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선거에 불리한 제국 정치권이 개표부정을 저지를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제국에 내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전군에 비상령을 발동하고 전력을 전진배치 한다는 발표를 곁들였다.
그러자 강국도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력 국가들이 이렇게 움직이자 군소국들도 전선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사방에서 제국에 대한 공세가 개시될 기세였다. 실질적인 위기를 절감한 제국 국민들은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투표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유례없는 투표율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우국의 경고에 마음이 쏠린 제국 국민들은 투표를 마치고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개표까지 지켜보아야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팎을 가득메운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표가 시작되었다.
개표조작으로 위기를 넘기려고 했던 정치권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렇게 가면 절대다수가 야인으로 돌아가야 했다. 자신들의 제안을 일축한 제국기업 출신 선거관리 위원장에게 압박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국민들이 저렇게 나오는 이상 투표조작은 엄두도 내지 못할 상황이었다.
개표조작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할 경우 국민들이 완전히 등을 돌릴게 분명했다. 군심을 장악하고 있는 야전사자들이 국민들의 요구에 호응하면 우국의 분석대로 내전으로 치달을수 밖에 없었다. 정치권의 수중에 있던 제국 전차부대가 유명무실해진 지금 승산이 전혀없는 싸움이라는 게 제국기업의 판단이었다.
정치권력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는 제국기업이 이렇게 나오자 정치권은 지리멸렬해져 버렸다.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 개표는 신생정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환호를 지르며 투장을 빠져 나온 제국 국민들은 야전사자들이 평화의 당으로 이름붙인 선거사무실로 몰려갔다.
전쟁으로 국가가 부강해 졌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던 기업들의 잔치였다. 기나긴 전쟁을 통해 학습과정을 거친 제국 국민들에게 종전만큼 이익이 되는 선물이 없었다. 그들만의 잔치를 끝내고 자신들의 잔치를 시작한 제국 국민들은 새로운 희망으로 밤을 새웠다.
중립을 지키며 정치권의 경거망동을 경계한 제국기업 덕분에 정권인수가 순조로웠다. 일사천리로 내각 인선이 진행되었다. 국가운영 경험이 일천한 신생정당은 자신들의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질서를 중시한 제국기업에게 손을 내밀어 합당한 인물들을 각부처에 등용했다.
곧바로 종전협상을 제안한 평화의 정권은 모든 나라의 대표들을 제국의 수도로 초청했다. 혹시모를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 각국의 협상대표단이 몸을 실은 비행기가 국경선을 넘어서는 즉시 제국 전투기들이 호위비행에 들어갔다. 그리고 정치인 암실때보다 더 삼엄한 경비가 제국 수도에 펼쳐졌다.
우국 대표단을 맞이한 야전사자들은 예의 소년병들이 함께 왔음을 확인하고 중립동기들을 힐난했다. "허허... 군사분야도 성에 차지않아 외교협상 까지 가르치려고 하십니까?" 웃음으로 화답한 중립동기들은 정치인으로 변신한 세사람에게 정중히 목례를 했다.
야전사자들과 중립동기들이 담소를 나누며 걸어가는 사이 젊은 장교들이 소년병들에게 다가왔다. 화려한 계급장은 물론 훈장까지 가슴에 달고있는 제국의 장교들이었다. 대뜸 손을 내민 장교들은 관등성명을 대며 동등한 통성명을 시작했다. 계급장 조차 달지않은 소년병들이었지만 군인중의 군인이라는 무언의 인정이었다.
각국의 협상대표단이 속속 도착했다. 이미 점령당해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는 나라의 대표단도 함께하고 있었다. 모든 나라가 포함된 전방위적인 평화협상이 바로 우국이 내걸었던 조건이었던 것이다. 정도껏 경영해온 제국기업도 이런 협상에 그리 손해볼게 없었다.
반면 번영기업류는 문을 닫을수 밖에 없는 흐름이었다. 무리한 이익 추구가 화를 불렀던 것이다. 피점령국의 국권이 회복되었고 적정선에서 합의된 수준에 맞추어 각국의 군축이 단행되었다. 파국으로 치달아 보게될 손해에 비하면 커다란 이익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모든 나라가 찬성하는 종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극과 극은 만난다. 아이들이 한가롭게 뛰어놀수 있는 평화로운 일상... 사람이 바라는 가장 작은 소망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커다란 욕망인 정치는 이익을 쫓아간다. 따라서 정치를 일상에 종착시키기를 바라는 것 만큼 커다란 바람은 없다. 세계를 정복하겠다던 위인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꿈꾸지 못할 대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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