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현실과 이상
기업이 정치에 개입한다고 해서 비난을 할 수 있을까? 군이 정치를 장악한다고 그르다고 할 수 있을까? 상식선의 행동들은 그렇게 한다. 하지만 보다 정밀한 접근은 다르다. 권력구조상 그러한 생리를 가지고 있어 당연한 움직이지만 최적화로 발전하는 진보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상과 현실을 다같이 보는 시각은 위와같은 답을 내놓는다. 악이니 정의니 하는 관념에서 탈피한 것이다. 이상에 현실을 꿰 맞추지도 않고 현실에 이상을 떨어뜨리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가 다른 것이다. 아니라면 불경을 내뱉는 승려 모두가 다 부처가 되어버린다.
모두가 부처라는 말은 그만큼 발전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확대 해석해서 두사부일체를 하다보면 논리깡패를 벗어나지 못한다. 산을 산으로 보지 못하고 물을 물로 여기지 않는다. 이상은 이상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만고의 진리가 박탈된 불량인식을 강요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상황에 따라 기업이 정치 전면에 나서기도 하고 부득이 할 경우 군이 앞장서기도 하는 것이다. 바르다 그르다 이전에 처해진 상황이 선택해가는 현실이라고 볼수 있지 않는가? 그때 이랬으면 더 좋았을 수 있겠지만 이것 또한 관념에 불과한 가정 아닌가?
제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현재의 질서가 그랬다. 기업이 전면에 나선 나라가 대부분이었고 드물게 정치가 끌어가고 있는 나라도 있었다. 또한, 강국 처럼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군사가 통합되어 삼두마력으로 달려가는 나라도 있다. 이렇게 각양각색의 국가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흐름이 현실이었다.
작전처장은 다양한 국가들 사이를 조화롭게 연결해 전쟁을 끝낼수 있는 방법을 찾기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그동안 보안대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었던 첩보대의 보고서를 실시간으로 취합해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휴가때마다 그림자 부대를 찾아갔던 진짜 목적은 첩보대의 방대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제약이 풀리자 국제정세가 전략처장의 머리속에 실시간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각국의 정치경제 상황과 군사동향이 입력되었다. 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첩보대가 제국기업을 속속들이 파악해서 보내준게 바로 이시기였다. 필요한 모든 정보가 돌아가며 분리되고 있었다.
중요한 것, 그리고 연관성이 있는 것들로 짜여지며 나머지를 털어내는 원심분리 과정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 연산이 끝났다. 개운한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선 전략처장은 수화기를 들어 중앙 전선에 있는 전략과 서부전선에 있는 전술과 일격, 그리고 공병대 소속의 소년병을 수도로 불러들였다.
주어진 여건 내에서 폭발물을 급조해 내는데 일가견을 가진 공병소년 또한 열다섯 이었다. 소년병들이 회의실에 도착하자 자리에서 일어선 중립 동기들이 차례로 악수를 청했다. 계급을 의식하지 않는 중립 동기들은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군인대 군인으로서 인사를 나눈 것이었다.
자리에 앉을 것을 권유한 작전처장이 국제정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연이은 대규모 공격이 강국에서 개발하고 있는 신형 미사일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 전해들은 사람들은 적잖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워낙 무게있는 내용이라 첩보를 직접 접하고 있는 그림단장등 극소수만 공유하고 있던 정보였다.
우국의 첩보망이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을 무려 일년전에 파악한 제국의 정보망이 그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우국을 하루아침에 점령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침투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우국이 전쟁으로 정면 승부를 걸기에는 너무 거대한 저력이었다.
전쟁으로 뻗어나온 제국의 방향을 한두나라의 힘만으로 종전으로 트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내린 작전처장의 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우국을 포함한 주변 모든나라는 물론이고 제국 까지 끌어들일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 내자는 것이었다. 제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국제질서를 통째로 움직여 보자는 제안이었다.
가장 먼저 전쟁 억지력을 보여준 나라는 강국이었다. 정치기업간의 거래로 전쟁이 지속되었던 우국도 중립 군인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제어력을 확보한 상태다. 이외 나머지 나라들은 흐름이 만들어 지면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강국과 우국이 발목을 잡아주지 않을경우 제국의 모든 전력이 쏟아져 들어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말한 작전처장이 직선장군의 권총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이기는 전쟁을 위해서 제거해야 할 상대는 야전사자들이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쏘아야 할 상대는 제국의 정치인들 이라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끝내기를 선택했으니 제국의 주요 정치인들을 암살하자는 말과함께 소년병들을 쳐다보았다.
비로서 자신들을 부른 이유를 알게된 소년병들은 일제히 작전처장을 주시했다. "이 권총으로 정치인들을 암살하면 제국의 주춧돌인 야전사자들에게 의혹이 쏠리겠지... 그렇지 않아도 껄끄러워 했던 정치권이 갖은 모함을 동원해 공격할게 틀림 없어... 그때 우리들이 사실을 알리고 나서면 전쟁은 끝나게 되어있어..."
의혹이 해소되며 확인되는 진정성 만큼 신뢰와 지지를 폭발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정치적 장치는 없었다. 마냥 믿어주세요 한다고 지지자가 생기는 게 아니다. 야전사자들이 의심받게 만들어 정치권의 무차별 공격을 유발시킨 후 혐의를 풀어 제국 국민들의 정치적 지지를 완벽하게 끌어내자는 구상이었다.
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첩보대가 있었지만 정치인 암살을 시도할 수 없는 상태였다. 우국기업에 보냈던 첩보원이 생포되어 주요인물 암살까지 포함된 점령계획이 탄로나자 보복을 우려한 제국이 신변경호를 대폭 강화했기 때문이었다. 별 의심없이 목표인물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어리디 어린 소년병들 뿐이었다.
그래서 상황판단이 정확한 전술과 최고의 저격수인 일격, 폭발물 전문가인 공병소년을 부른 것이었다. 열다섯 동갑인 이들 셋의 암살임무를 정찰조장과 함께 첩보대를 총동원해 전략이 뒷받침 하라는 것이 작전처장의 명령이었다. 즉시 자리에서 일어선 소년병들은 지체없이 동부전선으로 출발했다.
동부전선은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산악지형이었다. 제국이나 우국 모두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에 전념하고 있을만큼 험준했다. 공격자의 무덤이기도 했지만 첩첩 산중이다 보니 방어망이 완벽할 수 없는 단점도 있었다. 양국의 첩보병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는 침투로가 여기에 있었다.
돌아가다가 생포된 제국기업의 첩보원은 촉박한 시간을 맞추기 위해 수도에서 가까운 서부전선을 택했었다. 중앙전선이 더 가까웠지만 제국 특수부대가 건드려 놓은 벌집이었다. 그 촘촘한 경계망을 도저히 뚫을 수 없다고 판단한 제국이 서부전선을 택했던 것이다.
소년병들을 배웅한 중립 동기들의 표정이 씁쓸했다. 말은 안하고 있지만 어린 아이들에게 암살임무를 맡겨야 하는 전쟁현실이 아팠고 이번 일을 한몸에 책임지려고 하는 전략처장의 결심이 쓰렸기 때문이다. 야전사자들의 정치적 입지를 높여 평화협상에 나설경우 암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 올게 뻔했다.
그 책임자를 자처하고 있는게 작전처장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사전 설명도 없이 소년병들을 소집한 회의 석상에서 자신의 구상을 일방적으로 털어놓았던 것이다. 주어진 현실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동기중 누구라도 그런 결심을 할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상으로 가기위해 치루는 댓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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