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전쟁의 그림자
부대장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들이마신 술잔을 탁자위로 내려놓은 작전처장은 처음 도착할 때 보았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한가지가 빠진것 같군... 그것만 가지고 전멸할 제국군이 아닌데... 즉발식 수류탄은 모두 없앴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고... 다른 하나는 무엇이지?"
날카로운 빛이 뿜어져 나오는 안경뒤에 그가 있었다. 조금전 까지 스스로 따른 술잔을 쉴새없이 비우며 부대장의 설명에 혀꼬부라진 추임새를 넣기 바빴던 사람이었다. 거북하게 부른 배를 쓰다듬고 있던 전략은 자신도 모르게 기대고 있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딴에는 그렇군... 하지만 산위에서 지원부대의 일거수 일투족을 본의아니게 감시하고 있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리가 있나?" 그림단장이 정색을 하고 작전처장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작전처장은 어서 말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보안문제 때문에 외부엔 일체 알리지 않고 구축한 지하참호가 있었네... 집단호는 위성에 들키지 않고 지하참호를 구축하기 위한 위장이었지... 집단호 사이엔 바둑판 모양으로 구축된 지하참호가 있다네... 우리 지원부대와 그림자 저격단만 알고있는 사실이지..."
말을마친 부대장이 한모금 축이며 빙그레 웃었다. "자네에게 꼭 구경시켜 주고 싶었는데 조사단이 불청객으로 딸려온다는 통보를 받자마자 폐쇄해 버릴수 밖에 없었네... 즉발식 수류탄을 뼈대로 작전을 수립하다 보니 주력했던 지하참호를 종속변수로 내놓게 되더군..."
산위로 올라가는 경사면 전체에 구축된 지하참호는 웬만해서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입구에 해당하는 집단호를 이동해 가면서 산위의 그림자 저격단과 협공할 경우 소수의 병력으로 방어효과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방어계획이 수정되자 산정상 근처만 남겨두고 아래에 있는 모든 입구를 폐쇄해 버렸다. 제국군이 집단호를 거의다 점령했을 때서야 알아차리게 만드는 장치였다. 지하참호를 발견하게 된 제국군은 모든 병사들에게 이것을 알리고 수색병을 투입했다.
손전등을 켜고 주의를 기울였지만 곳곳에 장치된 즉발식 수류탄이 폭발하면서 일차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것을 매복해 있던 우국군의 공격으로 착각해 총을 난사하며 안전핀을 뽑아대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수류탄이 더 터질수 밖에 없었다. 제국군 스스로 수류탄 자폭을 하게된 겪이었다.
집단호 보다 더 폐쇄된 지하참호에서 울리는 총소리와 폭발음은 치열한 전투를 사실화 했다. 그렇게 고전하며 확인한 지하참호가 경사면 전체에 펼쳐져 집단호를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제국군은 각각의 입구를 찾아 제일먼저 수류탄을 집어넣어 진입로를 개척하려고 했다.
이것이 작전처장이 가졌던 의문의 열쇠였다. 모든 집단호에서 수류탄을 뽑아들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가 부대장의 처음 설명에는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의혹을 제기했던 것이다. 위에서는 기관총, 저격, 충격식 수류탄이 쏟아지고 뒤늦게 발견한 지하참호에서 수류탄이 폭발해 제국군의 주의력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수류탄 덫을 장치하며 위치를 모두 기록해 놓았지만 제국군이 진입하면서 엉망이 되어버렸어... 시신이 뒤덮은 것도 있고... 나무가지에 안전핀 고리를 걸어 밟거나 건드리면 빠지게 장치했기 때문에 지뢰보다 더 제거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더군... 최소 보름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네..."
살아 돌아간 제국군중 지하참호의 존재를 알고있는 사람이 있을수 있었다. 또한, 제국군 수뇌부까지 무전교신을 통해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 사용한 즉발식 수류탄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우국의 조사단이 지하참호의 존재를 모르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우리 시험을 거뜬히 통과 하는군... 자네의 날카로운 판단력은 여전한 걸!" 부대장과 그림단장이 마주 웃으며 술잔을 치켜 들었다. 잔을 부딪친 작전처장은 단숨에 들이킨 후 벌떡 일어섰다. 엄숙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커다란 유리병을 끌어안고 돌아왔다.
"올해도 이 술을 차지하게 되었군 ... " 그가 황홀한 표정으로 치켜든 유리병 안에는 짙은색이 감도는 술이 호롱불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향긋한 봄꽃들을 조금씩 넣은 후 여름에 갓 솟은 순들을 재우고 가을 열매로 덮어 숙성시킨 술이었다. 작전처장이 유일하게 열광하는 야전술 이었다.
이 이름도 그가 지은 것이었다. 용광로 처럼 일어나는 야전본능을 냉철한 이성으로 누르고 누르다가 일년에 한번씩 밤세워 푸는 것이 작전처장의 하나뿐인 낙이었다. 경건한 자세로 한모금 들이키자 목을타고 꿈틀 거리며 야성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내려놓은 잔가엔 흘러내리는 끈적한 술이 반 넘게 수평을 찾아가고 있었다. 다 여물지 않은 여린 재료들이 고농도의 진액을 술에 토해낸 결과였다. 낮은 도수에도 불구하고 취하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알콜의 확 퍼지는 불길을 감아 혈관속으로 휘돌게 만드는 매력을 가진 술이었다.
혼자서 끌어안고 서너잔을 음미한 작전처장은 그제서야 갈증이 풀린듯 잔을 권하기 시작했다. 한잔씩 받아마신 두사람도 친구따라 술나라로 직행하고 있었다. 아직 술맛을 모르는 전략은 세사람의 음주투합이 마냥 신기했다. 하지만 잠시뿐 오고가는 술잔이 최면을 거는 듯 스르르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미안한 생각이 든 그림단장이 부관을 불렀다. "이 아이를 소년병들이 있는 오두막사로 데려다 주게... 그런데 같은 또래가 있을지 모르겠군... 징집연령이 낮추어져 이젠 열다섯살 짜리도 입대를 한다네... 이게 말이나 되는가?"
부대장 동기들이 가장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고 있기는 했지만 수용인력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얼마 안가 15세 어린 아이들이 최전선을 겨누어야 하는 참담한 지경에 놓일게 뻔한 일이었다. 그림단장은 최대한 많은 어린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저격은 자질이 아닌 연습이다. 타고난 저격수와 어릴때 부터 노력한 저격수의 실력은 별 차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면 어릴수록 좋으니 다 보내달라는 신청서를 징집관에게 보내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해서 2차에 걸친 배치가 있었고 스무명 남짓의 아이들이 두개의 오두막사에서 안전하게 지내게 된 것이었다.
저격단에 입대한 것이었지만 아이들은 총을 만져본 적이 별로 없었다. 대신 방치된 논밭에서 자생한 작물들을 수확하는 식량조달 역할을 했다. 미사일 기지가 들어선 후 광범위한 지역에 출입금지가 선포되었고 이곳은 그 중심지였다. 미처 수확하지 못했던 작물들이 씨앗으로 발아하기를 거듭해 오늘에 이른 것이었다.
멧돼지나 고라니 같은 산짐승들이 고구마나 감자를 캐먹기 위해 풀들을 쓰러뜨리고 지나갔다. 풀들이 제거된 자리에 빛이 들면 낮은 작물들이 햇빛을 받아 금새 자라나기 시작했다. 땅을 파헤치고 배설로 거름까지 해주는 자연의 경작은 사람의 손길이 따라갈 수 없는 풍성한 선물 보따리였다.
그림단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전략의 눈가에 착잡함이 어렸다. 가끔 해맑게 웃기도 하며 담담한 표정을 잃지 않았던 전략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부대장이 이유를 물었다. "제 동생도 열다섯 입니다. 이번 전투에 주제넘게 끼어들었던 것도 전황이 불리해져 징집연령이 낮아질 것을 걱정해서 였습니다."
전략에게 동생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세사람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교환하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네 이름이 아주 특이해서 금방 새겨지는 데... 동생의 이름은 무엇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름인가?" 전략이 보여준 뛰어난 지략에 감탄해 마지않던 세사람은 귀를 쫑긋이 세웠다.
"전술... 입니다." 역시나 하며 안경뒤로 물러앉은 전략처장은 전략이 대답을 하자마자 재차 질문을 꺼냈다. "전술... 전략전술 형제라... 네 동생도 너처럼 병법서를 꿰고 있나?" 당연히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한듯 전략의 대답이 신속하게 나왔다. "예... 기갑쪽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음... 기갑이라... 알고 있겠지만 이번 전투로 우리측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어... 그것을 메우기 위해 대규모 징집이 이루어질 것이고 소년병들도 그만큼 많아지겠지... 기억하고 있다가 네 동생이 입대를 하면 기갑이 주력인 서부전선을 지휘하고 있는 친구에게 부탁을 해볼께..."
술기운에 자상한 표정을 못다숨긴 전략처장이 깍지를 끼며 턱을 고였다. "네게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단다. 왜 즉발식 수류탄을 숨기려고 하는 것이지? 비밀을 유지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전략이라는 소년이 빙산의 일각을 보여준 것이라는 답을 바라면서 나즈막히 물었다.
"즉발식 수류탄은 방어형 무기입니다. 존재를 숨기고 사용해야 효과가 나타나죠. 적국이 사용하면 우리 또한 곤욕을 치루어야 합니다.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면 우리도 방어만 하고 있을수는 없게 될테니까요. 게다가 제조가 쉽습니다. 기존 신관에 약간의 변형만 가하면 됩니다."
"더 이야기 해주면 안될까? 난 의문이 생기면 잠을 못자는 사람이야... 내일 아침에 토끼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작전처장의 은근한 채근에 전략이 다시 입을 떼었다. "치열한 첩보전을 벌이고 있지만 우리 나라가 제국의 상대가 되지는 않습니다. 즉발식 수류탄이 세상에 나가면..."
물잔을 들어 한모금 들이킨 전략이 말을 이어갔다. "제국은 틀림없이 우리 무기생산에 혼란을 주려고 할겁니다. 제조회사든, 제조 인력이든, 아니면 정치권까지 손을 뻗어 우리가 했던것과 비슷하게 즉발식 수류탄을 지연식과 섞어버리겠지요."
"이렇게 되면 우리는 모양이 똑같은 수류탄을 전량 폐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안전핀을 빼가며 확인해야 하는데 소모되는 시간과 위험도를 감안하면 폐기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만약 중간에 알아차리지 못해 전선에 보급되면 제국의 특수부대 처럼 자기도 모르게 자폭하는 결과가 만들어 질겁니다."
"별거 아닌것 같지만 무기는 각각의 기능으로 조화를 이루어 전장을 끌어가는 톱니바퀴 같은 것입니다. 수류탄을 사용할 수 없는 군대는 맞물려 삐걱거리는 제동 전파력을 만들어 냅니다. 전력을 감소시켜 버리죠. 그리고 우리가 제국의 무기제조에 가일수 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단숨에 뱉어내는 전략의 생각에 충격을 받은 세사람의 술기운이 새벽바람에 떠밀려 달아나 버렸다. 군사분야 뿐만 아니라 정치외교와 경제가 모두 어우러진 전략적 안목을 17세 소년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작전처장의 뱃속에 또아리를 튼 야전주가 커다란 욕심을 토하기 시작했다.
'저 나이에 저 정도라니... 동생도 못지않겠지... 족쇄에서 벗어난 동기들이 부채살을 활짝 펼친 틈새를 전략전술 형제가 메워준다면 전쟁을 끝내 버리려는 우리의 바람을 마음껏 부칠수 있을 것 같은데... 때묻지 않은 심성이 온전한 그림을 품어주는 흰 종이와 같구나...'
깊은 생각에 잠긴 작전처장이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를 받는 사이 부관을 따라 밖으로 나온 전략은 소년병 막사로 들어섰다. 서너명의 아이들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겸연쩍은 웃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지원부대에서 올라왔다는 소리에 우르르 몰려온 아이들은 이번 전투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대충대충 이야기를 해주고 구석에 누은 전략은 자기도 모르는 새 잠에 빠져 들었다. 약 한시간 후 많은 발자욱 소리에 얼핏 잠이 깼지만 눈이 떠지지를 않아 귀만 열어놓았다. 막사에 있던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고 새로운 아이들이 들어와서 티격태격 하며 장난을 주고 받았다.
자신의 동생도 이렇게 좋은 곳에 배치되기를 바라며 다시 잠에 빠져든 전략은 무거운 것에 눌려 잠에서 깨어났다. 밤을 새운 아이들이 이리저리 뒹굴며 잠들어 있었고 그중 하나의 발이 자신을 누르고 있었다. 밖에는 하늘높이 가린 나뭇잎 사이로 내려온 햇살이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오두막사 입구엔 어제 보이지 않던 자루들이 쌓여 있었다. 열어보니 산열매, 감자같은 뿌리작물들이었다. 위성의 감시에 노출되는 지역을 채집하기 위해 밤에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밤낮이 바뀌기는 했지만 천진난만함을 그대로 간직한 얼굴로 포근하게 잠든 모습을 보니 웬지 마음이 놓였다.
문득 자신의 인사를 머리 밖으로 답하던 작전처장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무슨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을 할수는 없었지만 마음으로 전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이 전쟁에 대한 목적을 가진다면 그것은 가급적 빨리 전쟁을 끝내 버리는 것이었다. 그들에게서 비슷한 생각을 읽었다는 희망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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