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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궁전으로 향하던 철갑 제일기사는 남쪽 변두리에 있는 그림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일단의 화가들이 마을 진입로에 무언가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서보니 이미 마을 안쪽길은 갖가지 그림으로 뒤덮여 있고 죽은지 오래된 금속나무 밑둥을 파내어 만든 집들도 모두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화가들 중 한명이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 철갑 제일기사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옵니다. “어서 오십시오. 우리의 작품이 마음에 드십니까?”, “예, 정말 아름다운 그림 들이로 군요”, “하하하, 지금 그린 그림들이 다 마르려면 당분간 길옆으로 다녀야 합니다.”
"길에도 그림을 그리다니... 저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방식입니다.”, “우린 그릴수 있는 모든것에 그림을 그립니다. 집에도, 지붕에도, 공해라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물감은 모두 천연재료로 만든 것이라 시간이 지나면 모두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죠."
"그렇게 그림이 사라진 곳이 우리의 새로운 그림 공간이 됩니다.", “아주 잘 그려진 그림이 그렇게 사라지면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우린 자신의 생각을 화폭에 담아내는 것 자체를 즐기고 있답니다. 우리들 중 그누구도 영원불멸의 진리를 터득한 마우스는 없습니다."
"아마 수많은 시간이 흘러 그런 깨달음을 얻는 마우스가 나타나면 자신이 깨달을 것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불멸의 붓을 들겠지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화가 마우스는 철갑 제일기사를 마을 중간에 있는 광장으로 인도했습니다.
때론 현란하기도 하고 때론 소박하기도 한 다양한 그림들이 마을을 뒤덮고 있습니다. 광장 가운데에는 표면이 아주 매끄러운 하얗고 평평한 큼지막한 돌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돌이 바로 영원불멸의 진리가 담겨질 돌입니다. 우린 이 영원의 돌에 그릴 수 있는 깨달음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마을에 그려진 모든 그림들이 바로 그런 깨달음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을 붓으로 표현한 것 이지요", “그런 그림이 그려진다면 모든 마우스들이 이곳을 찾아오겠군요?”, “하하하 그러한 때가 오늘이 될지 수만년 후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어둠나라 마우스는 아니신 것 같은데...?”
“예, 저는 빛의 나라에서 온 철갑 마우스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면 위험 합니다. 성안에는 검은 반점이 있는 마우스들만 거주하고 있습니다. 검은 반점이 없으면 붙잡혀 성밖으로 쫓겨나지요.”, “저도 검은 반점이 있으니 그럴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하하하, 옆구리 부분에 그려진 검은반점은 벌써 반쯤 지워졌는데요?” 이 말에 화들짝 놀란 철갑 제일기사는 옆구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들키고 말았군요?”, “그러니 쫓겨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내에 들어가 본적이 있으신가요?”
“예, 대부분의 물감을 우리마을에서 나오는 식물에서 추출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일부 자생하지 않는 식물로 만든 천연염료를 구하기 위해 가끔 들리곤 합니다.”, “화가님은 검은반점이 전혀 없으신데... 쫓겨나지 않으셨나요?”, “우린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화가 마우스는 물감통에 있는 붓을들어 자신의 몸에 검은반점을 그려보였습니다. “이렇게 물감을 칠하면 완전히 검은 마우스가 되지요.”, “그것이 지워지지는 않습니까?”, "아까 일정한 시간동안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한 일년 동안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기간내에는 우리가 만든 특수세척제가 아니면 물로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 쪽으로 와보십시오.” 철갑 제일기사의 몸에 적당히 검은반점을 그려준 화가 마우스는 자그마한 유리병을 건네주었습니다. “이것이 특수 세척제입니다. 검은반점이 필요 없어지면 이것으로 닦아 내십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요긴하게 쓰이겠군요. 이 물감과 세척제를 더 얻을수 있겠습니까?”, “아 물론이지요. 우리 그림 마을엔 쓰고도 남을만큼 많으니 필요한 만큼 가져가십시오.” 다섯 명의 정찰대가 사용할 만큼의 양을 얻은 철갑 제일기사는 배낭을 다시 꾸리고 감사의 인사를 전한후 어둠궁전으로 향했습니다.
이틀을 더 걸어 어둠궁전에 도착한 철갑 제일기사는 물샐틈 없이 펼쳐져 있는 삼엄한 경계에 혀를 내두릅니다. 중무장한 검은 마우스들이 곳곳에서 보초를 서고있고 일정한 시간간격으로 십여명의 병사들이 성벽 외곽을 이동하며 정찰을하고 있습니다.
화가 마우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성벽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요새로 돌아갈뻔 했으리란 생각에 돌아갈때 작은 보답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상대로 별 제재없이 성문을 통과한 철갑 제일기사는 푸른 마우스가 일러준 동남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어둠궁전 외곽 성벽엔 푸른 마우스 말대로 성벽을 넘어온 장미넝쿨이 땅에닿을 듯 늘어져 있습니다. 밤이 되길 기다린 철갑 제일기사는 장미 넝쿨을 타고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날카로운 장미가시 때문에 생각보다 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손발에 상처가 늘어갑니다.
중간 지점에서 잠시 숨을고른 철갑 제일기사는 장미줄기를 세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우주의 빛과 어둠이 교차 이동하지 못해 생긴 낮과 다름없는 백야라 장미가시의 배열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올라가는 속도를 줄이고 장미가시를 피해 손발을 옮기니 가시에 찔리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성벽위로 오르는데 성공한 철갑 제일기사는 상처투성이인 손발을 내려다보며 통증을 참기위해 기를 끌어모았습니다. 빛의 나라에서 제일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체력뿐만 아니라 뛰어난 검술과 판단력, 폭넓은 지식과 일반 마우스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내력까지 갖추어야 가능합니다.
그런 제일기사인 자신이 탈진 직전까지 가서야 성벽에 오르는데 성공한 것을 되새겨 보니 장미넝쿨이 천혜의 침입 차단장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왕궁의 경비가 결코 허술한 것이 아님을 파악한 철갑 제일기사는 아침이 오기전에 서둘러 성벽안쪽으로 내려와 장미정원으로 들어갔습니다.
한시간을 허비한 끝에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아낸 철갑 제일기사는 온신경을 곤두세우고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일단 발끝의 감각만으로 계단을 더듬어 내려간 철갑 제일기사는 귀를 기울여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배낭에서 발광 다이아몬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관측요새에서 출발할때 필요할것 같아 세명의 제일기사가 각각 하나씩 가지고 나온것입니다. 관측요새에는 첩보활동에 필요한 거의 모든 장비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중 은빛 사령관의 세심한 지시로 빛의 나라에서 긴급 수송된 발광 다이아몬드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하는 순간입니다.
이 발광 다이아몬드는 그 숫자가 양쪽나라를 통틀어 수백개가 되지 않는 진귀한 것인데 이러한 것들을 좋아하는 수집가 마우스가 어둠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빛의 나라 바닷가에서 채집한 흑진주와 맞바꾸어 어렵게 모아 놓은 것이었습니다.
사방이 까마득히 높은 깎아지른 절벽과 큰산으로 막혀있는 어둠 나라에서는 바다에서 나는 특산물이 다른 무엇보다 높은 값어치로 유통됩니다. 우주의 빛을 빼앗기고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빛의 나라의 젊은 마우스들은 앞을 다투어 군대에 자원입대 했습니다.
일반 국민들 또한 전시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내놓았습니다. 수집가 마우스도 그들중 하나였습니다. 모든 국민들의 일치단결이 우주의 빛을 되찾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컴컴한 왕궁의 지하에서도 그렇게 내어준 발광 다이아몬드가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발광 다이아몬드 빛으로 앞을 비추며 한참을 들어가자 바닥에는 고농축 석탄돌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고 벽쪽에는 각종 철광석이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있는 커다란 가마들이 수천년의 먼지를 뒤집어쓴채 과거의 위용을 잃지않고 있습니다.
어둠나라의 문명이 시작된 역사적 현장에 발을 디디게 된 철갑 제일기사는 경외심과 함께 북극행성에 드리워지고 있는 전쟁의 암운에 가슴이 아파 옴을 느꼈습니다. 한쪽 구석에 침낭을 펼쳐 잠자리를 마련한 철갑 제일기사는 장미가시에 찔린 손발의 쓰라림이 다시 몰려오는 것을 참으며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어둠왕궁의 지하정찰에 들어간 철갑 제일기사는 며칠후 왕궁지하 중심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사방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통로를 사흘동안 헤매느라 돌았던 길을 돌고 또돌아 간신히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바깥쪽과는 달리 굵은 쇠창살로 통로를 막아놓아 더이상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복잡한 것 같던 통로는 일정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 지하기둥 기능을 하는 벽들이 사각형을 이루고 그 안에 네 개의 방들이 각각 커다란 문을 달고 있습니다. 각 방 천장에는 환풍구가 뚫려 있어 지하라는 느낌이 안들 정도로 공기가 신선합니다.
하지만 수천년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곳이라 바닥에 쌓여 있는 먼지의 두께가 상당해 발자욱이 움푹 파일 정도입니다. 만약 누군가 지하로 들어온다면 침입자의 흔적을 쉽게 포착할 수 있는 증거를 만들어 놓는것 같아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발자국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처음 들어왔던 입구에 도착한 철갑 제일기사는 주변을 다시 둘러보아 발자국이 모두 제거된 것을 확인한 후 숨을 깊게 들이마신 다음 자세를 낮추었습니다. 기사 수련시 헤아릴수도 없이 많이 연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환풍구를 향해 몸을 솟구쳤습니다.
아슬아슬하게 환풍구 입구를 붙잡은 철갑 제일기사는 팔에 힘을주어 몸을 끌어올렸습니다. 생각보다 넓은 환풍구는 몸을 숙이지 않고도 걸어 다닐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제 발자국에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된 철갑 제일기사는 가벼운 마음으로 발광 다이아몬드를 꺼내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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