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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정치언론

슬기로운 자율

자율의 의미

 

"자신의 의지 또는 이성에 따라 행위가 되어진 경우"가 자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율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렇다고 딱부러진 답을 하지 못할겁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성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 이성을 조종하는 갖가지 장치들이 국가사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교육과정 자체가 이성이라는 자율을 주입받는 것일 뿐입니다.

 

사회가 형성해 놓은 도덕적 기준과 법제도가 머리속에 만들어 놓는 것은 온전한 자율적 이성이 아니라 타율적 절반이성입니다. 불완전한 반쪽 자율이지요. 왜 절반밖에 안되는 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반쪽 자율

 

국가사회가 법제도 대로, 도덕적 양심으로 굴러간다면 절반짜리 이성이 존재하기 힘들겁니다. 탈법에 대한 규정된 응징이 가해지고 양심을 버린 사람이 발붙일 곳이 없을 경우 반공동체 세력은 도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상세계일 뿐 현실은 그렇지가 않죠. 소위 본받아야 하는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탈법, 비리, 범죄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진국 이라는 허울은 발발비율이 어느정도냐에 따른 상대적 기준일 뿐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서든 완전한 자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탈선을 일삼는 세력의 성공을 보장하는 비경쟁 지대를 양산하고 있지요. 이곳이 바로 기득권이 장악하고 있는 비자율지대, 속칭 블루오션 입니다.

 

비자율지대 그 블루오션

 

이곳에 입성하면 그야말로 땅짚고 헤엄칩니다. 놀고먹지요. 그렇다 보니 출세지향적 인물들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뛰어오르려고 합니다. 적당한 기만으로 권력을 잡아 입성에 성공하면 내려오지 않기위해 발버둥 치는 속성이 작동하죠.

 

역대 대통령 중 퇴임후 영향력을 확보하려 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더군요. 그래서 노무현 정신을 외쳐대는 노빠들을 보면 혀가 축구를 합니다.

 

반란, 혁명, 개혁은 이 비자율 지대를 다시 나누자는 크기다른 주장입니다. 반란은 완전히 뒤집어 엎는 것이고 혁명 또한 비슷한 강도를 가집니다. 판을 그대로 둔채 금만 다시 긋자는 것이 개혁이고요. 밥그릇 싸움이죠.

 

기만 당하는 자율

 

경제적 성공 후 정치적 입신을 모색하는 모 정치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먼지 안묻힐 수 있었겠는가... 이게 무서운 말이죠. 성공 하려면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거든요. 자율은 성공의 반대개념이라는 겁니다. 사실이죠.

 

이사람 또한 블루오션에 배띄우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불과 아홉명만이 뱃놀이를 할 수 있었던 곳입니다. 범여권은 경선 후보만 스무명이더군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목숨걸게 만드는 자리인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개혁과 민생경제를 입에 담은 자들 중 블루오션의 울타리를 허물자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비자율지대의 새로운 주인은 자신 뿐이랍니다. 자기 것이니 관습대로 달라는 것이지요. 사실 유권자의 것인데 말입니다.

 

자율을 무시한 성공

 

지금 기득권이 누리고 있는 정치, 경제적 풍요는 유권자의 것입니다. 헌법이 보장한 한표를 권모술수로 쓸어모아 자기들 곳간에 쌓아둔 덕분에 누리는 흥청망청입니다.

 

한국의 재벌들 중 부를 축적한 과정이 떳떳한 곳이 어디입니까? 별로 들어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자를 질시한다는 타령만 하고 있지요. 밀수를 하고 깡패를 동원해 철거한 자리에 아파트 지어서 성공한 신화에 불과합니다.

 

정도경영으로 성공한 재벌이 있었다면 언론들이 호들갑 떨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벌써 만인의 귀감이 되었겠지요. 국가사회의 영웅이요 어른 대접을 받고 있을 겁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던가요? 이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슬기로운 자율

 

개인이 양심을 지키고 법을 준수하는 것이 자율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반쪽 자율이죠. 모든것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이탈로 초래되는 불이익을 방지하기 위해 견제하는 권리를 동시에 행사해야 완전한 자율입니다.

 

유권자가 가지는 자율이란 투표에 참여하는 의무 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받을 불이익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로 확인하는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율은 유권자 자신의 이익을 빠짐없이 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의 자율은 합당한 댓가를 지불하는 것과 동시에 그 금액에 해당하는 결과를 담보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정치 소비자요 상품 소비자인 셈입니다. 따라서 의무가 아닌 권리주체로 자각하는 슬기로움이 필요하지요.

 

(기로운) (율) 운동

 

개굴님 께서 권리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운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거들떠 보지 않고 있는 중소노동현장에 종사하며 소외받는 이들의 아픔을 같이해온 분입니다. 이제 사회적 약자도 정치적 목소리를 가져야 할 때입니다.

 

혁명이나 정치세력화가 아닌 소외당한 개개인의 자각을 통해 스스로의 이익을 정치권에 알려서 방어할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을 일깨우려는 노력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중심에 서는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치권과 방송언론이 외면하고 있는 우리내부의 약자들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할 때입니다. "약자 자결주의"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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