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의 이익이 확실하면 내일의 지옥을 마다않는 것이 정치다.
그러므로 정치의 폭주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불이익 뿐이다. 이것이 바로 역린이다.
정세분석에 있어 절대다수는 당장의 역린을 건드리지 못한다.
측근은 자기들의 이익과 조직의 분위기 때문에 희망가 하나로 색칠할 수 밖에 없다.
일선의 살아있는 정보가 취합되면서 위로 올라가는 사이 덧칠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어떤 나라의 위정자도 이러한 인의 장막, 정보변조의 틀속에 갇혀있지 않은 경우가 없다.
이런 인지부조화 정보구조에서 벗어나 있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의 앞날은 밝다할 수 있다.
반대측도 공통의 울타리를 깰수있는 전망은 꺼린다.
이부분에 이해관계가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울타리가 깨질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지 못하면 정치의 폭주는 멈추지 않는다.
이미 울타리를 장악한 권력에게 당장의 불이익이 될 수 있는 건 울타리의 붕괴뿐이니까...
모든 정보는 가공된다. 분석 또한 의도가 개입된다. 있는 그대로 가감없이 놓여지는 분석이란 없다.
만약, 이러한 분석가가 단 한사람이라도 존재한다면 역사의 미아를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를 받아들인 주체는 이것을 자신의 이익으로 가공해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대로의 정보가 아니라면 모든 주체들의 이익이 뒤틀어져 버린다.
이렇게 꼬여진 상황은 역사의 흐름과 무관하게 관성을 형성한다.
역사라는 현실적 실체에서 떨어져 나간 다툼은 밑도 끝도 없는 수렁, 즉 늪이다.
서로 붙잡아 봐야 물귀신 밖에 되지 않는다.
정보의 총합체인 역사의 줄기를 붙잡지 못하는 자는 그렇게 멀어져 가는 시대를 놓칠뿐이다.
지금의 혼돈, 무질서, 임계점에 도달한 모든 문제들은 정보굴절에서 파생된 것이다.
정보에 의도를 심고, 이것에 수용자의 목적이 또 개입되어 증폭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실타래를 풀수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기쉽게 정리해 놓는 것 뿐이다.
감추는 것 없이, 더하는 것도 덜하는 것도 없이...
이위에서 뛰노는 모든 이익주체들은 가봐야 역사실체의 손바닥에서 뒹구는 것 뿐이다.
이익주체를 역사실체에 얼마나 가둘수 있는가가 세상을 다스리는 이로움의 크기인 것이다.
가공된 손바닥은 중력이 굴절되어 이익주체들을 가두어 둘 수 없다.
이렇게 튕겨져 나가면 앞발을 치켜드는 사마귀가 되는 것이다.
가공된 손바닥 역시 사마귀를 떠받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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