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종심절단 격파
그시간 지휘부는 휴게소에 들려 식사를 하고 있었다. 통신수단이 구비되지 않은 차량에 탑승해 있었기 때문에 점심시간을 틈타 제국의 전차가 대규모 기습을 감행해 온다는 것을 전혀 알수 없었다. 꼭두새벽 같이 출발해 이제 반시간 후면 행사장에 도착한다는 것이 그들이 알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었다.
1차 저지선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의 혼란스러움을 노려 기습에 나선 제국군은 강력한 반격에 직면했다. 하지만 숫적 우세는 물론이고 포병의 지원사격으로 저지선을 무너뜨려 가기 시작했다. 삼십분 후 국영방송국에 도착한 중립동기 지휘부는 그제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훈포상 방송에 대한 대대적인 예고방송을 해놓은 주최측은 서둘러 행사장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일선 지휘부 공백에 따른 사태를 항의하자 서부전선에 동부 사령관과 그 일행이 머지않아 도착할 예정이라는 말로 무마시켰다. 훈포상 행사를 일선 지휘부 교체로 활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나왔다.
어쩔수 없이 행사장에 입장한 중립 지휘부는 생중계 촬영기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훈포상은 두시간 후에 예정되어 있고 그전에 군의 지휘체계 확립과 개혁에 관한 토론이 계획되어 있었다. 토론이 시작되자 정치권 발언자로 나선 인물들의 중립동기 성토가 시작되었다.
국민여론을 돌려세우며 지휘권 박탈을 강행하려는 시도였다. 선의로 받아 들였던 행사가 군에대한 정치권의 일방적 개입으로 흐르자 국방부 장관이 얹짢은 표정을 숨기기 않았다. 합리적인 지휘로 현역시절 상당한 신망을 받았던 사람이다. 다만, 국방부 장관이 된 이후에는 정치권에 너무 많이 끌려다니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정색을 하고 항의했다. 하지만 정치권 인물들이 고함을 지르며 발언권을 독차지 해버려 이렇다할 의견을 표시할 수 없었다. 진행도 편파적이었다. 합리적인 이의제기로 정치권을 궁지로 몰라치면 말을 자르고 정치권 발언을 이어가게 만들었다.
확실하게 기선을 제압한 정치권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서부전선의 전황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며 생중계를 요구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서부전선의 영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휘부가 떠나자 마자 허가증을 꺼내든 국영방송의 직승기가 서부전선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화면에 우국진영의 배치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자 중립 동기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아무리 민간인들 이라고 하지만 이정도로 개념이 없다는 게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정도였다. 결국 촛점을 조정해 새까맣게 쇄도하고 있는 제국의 전차들만 비추기 시작했다.
중립동기들이 무전기를 요구하며 방송중단을 요청했지만 불가능 하다며 생방송에 통신암호를 노출시킬 수 없으니 수신되는 내용만 듣고 있으라고 이어폰을 연결해 주었다. 아쉬운대로 현장상황을 접한 지휘부는 답답한 심정을 누를길이 없었다.
1차 저지선이 벌써 무너져 가고 있었다. 지휘부가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하고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공략은 너무나 완벽했다. 오른쪽에 집중하면 거기에 두서너 배의 제국전차가 쇄도했다. 후미에 있던 포병력이 포격을 시작하면 어느새 흩어져 버려 빈표적만 두들겨 맞고 있었다.
이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명령이 상황실에서 발신되었다. 1차 저지선 근처에 있는 언덕 능선에 포진한 병력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조금더 기다렸다가 제국전차 대열이 지나갈 때 측면을 공격하라는 내용이었다. 암호로 발신된 내용을 자신들이 대동한 통신병의 해석으로 받아든 정치권이 잠시 소란스러워 졌다.
"조금 있으면 동부 사령관이 지휘공백을 메우기 위해 도착할 겁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세요. 지휘부가 이곳에 있는데 서부전선 상황실에 무슨 권한이 있어서 이런 명령을 내립니까?" 이렇게 외치는 정치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참한 결과가 들어왔다.
일단의 제국전차들이 동산의 형체를 날려버릴 만큼 대규모 포격을 가하며 능선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 봐요! 지들이 뭘 아는게 있다고... 서부 사령관은 빨리 명령을 내리세요." 정치권의 비난이 비오듯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서부사령관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 또다른 명령이 상황실에서 전파 되었다. 1차 저지선에 있는 모든 병력은 신속하게 전선을 이탈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본진으로 돌아오지 말고 사방으로 최대한 흩어져 살아남으라는 명령이었다. 군대에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토론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정치인들이 멱살을 잡을 기세로 중립 동기들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서부 사령관의 팔을 잡아끈 국방부 장관이 정치권이 내던진 종이들을 밟으며 구석으로 걸어갔다.
"저런 명령은 있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더구나 명령권자가 자리를 비운 이때 말일세... 정치권의 요구를 들어주게, 안그러면 자네들은 옷을 벗을수 밖에 없어... 굴욕을 참아가며 비위를 맞추던 내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말게... 자네들의 뒷받침이 없으면 정치기업의 압력에 무너져 엉망인 무기로 싸워야 할거야..."
싸늘한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던 국방부 장관이 처음으로 심중을 드러냈다. 전선에서 피흘리고 있는 장병들의 손에 적보다 더 무서운 장애물인 무기를 쥐어줄 수 없다는 고뇌가 있었던 것이다. 이번 행사를 가장 반대했던 인물이 그였다. 그러다 국방부 장관 교체를 꺼내들자 물러섰던 것이었다.
이기업 저기업 이익을 조율해 주며 차악의 무기라도 선택해 근근히 버티고 있던 자리에 정치장관이 들어설 경우 참혹한 결과가 불가피했기 때문이었다. 외로웠을 그의 토로에 손을 마주잡은 서부 사령관이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했다.
고집을 꺽지 않는 서부 사령관의 이야기를 다 들은 국방부 장관은 어쩔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돌아가 앉았다. 그 이후부터 자신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정치권의 고함에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격양된 정치권은 토론장에 있는 모든 군인들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휘관들은 목석이었다. 정치권의 고함을 한귀로 흘리고 서부전선의 상황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동산능선을 집중 포격으로 무너뜨리며 넘어선 제국 전차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우국의 병력을 추격하는 양익을 뒤로하고 전속력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제국도 예상하지 못했던 속도였다. 그 바람에 후방에 있는 포병의 지원이 불가능해 지고 있었다. 전진방열 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추월해 진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빠르면 빠를수록 전세를 완전히 굳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국의 전차가 우국 본진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1차 저시선이 빠르게 붕괴되었기 때문에 고스란히 쏟아져 들어오는 대규모 전차대열 이었다. 그 선두가 우국 본진을 사거리 내로 확보하기 시작할 무렵 우국의 대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폭발하는 거대한 파열음과 함께 휘말려 올라간 흙먼지 아래 네모난 도장을 찍은 듯한 탄착점이 드러났다. 중앙 선두에 커다란 전차무덤이 연기를 뿜어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경계선을 맞춘 다음 포도장이 찍히고 있었다.
제국 전차대열 종심에 커다란 틈새가 벌어지자 기다리고 있던 우국의 전차들이 짖쳐들어갔다. 뒤이어 대전차 병력을 실은 장갑차와 전투병들이 탑승한 짚차들이 쇄도했다. 대전차전 때와 똑같은 공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포병의 완벽한 사전지원 덕분에 별다른 피해가 없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이때부터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제국전차대열 종심을 도장찍기 포격으로 절단한 우국의 포병은 양쪽으로 벌려가며 무차별 포격을 시작했다. 포격이 훑고 지나간 자리를 대전차 병력과 전투병이 메우며 주저앉은 제국전차를 진지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달아나는 패잔병들을 추격하던 제국의 양익은 이럴수도 없고 저럴수도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방향을 돌려 본진을 지원하자니 코앞에 있는 패잔병들의 반격에 노출되고 그냥 있자니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는 본진을 돌파해 우국의 지원병력이 후미를 급습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군의 지원을 요청할수도 없었다. 중앙전선에 있는 우국의 미사일 기지가 제국의 경제급소를 볼모로 삼아 체결된 상호 공군력 불개입이라는 협약을 깨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지휘부와의 협의 끝에 본진을 포기하고 양익만이라도 보전하기 위한 후퇴를 시작했다.
이즈음 서부전선에 도착한 동부 사령관 일행이 방송 기자들을 대동하고 위병소를 통과하고 있었다. 중앙전선에도 정치권이 파견한 장성이 도착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지휘부 막사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서 발사했는지 알수없는 총알이 귓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발사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저격이 틀림 없었다. 일행이 그를 감싸안으며 사방을 경계했고 그사이 지휘부 막사에서 일단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와 사주경계를 펼치며 안으로 인도했다. 총알이 박힌 나무기둥을 살펴본 결과 제국 저격병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는 파열탄 인것으로 밝혀졌다.
목표물 내부에서 폭발하도록 고안된 일발필살용 저격탄 이었다. 생방송으로 중계되고 있어 이런 장면이 고스란히 전파를 타고 있었다. 긴급상황이 타전되었고 모든 부대의 지휘관 보호조치가 내려졌다. 동부 사령관 일행도 서부전선 병력의 보호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 철책선으로 격리된 곳에 지휘부 막사와 숙소가 있었다. 방송기자들은 신원이 모두 확인될 때까지 접근이 금지되었고 안전을 위해 지휘부 막사 보다 깊숙하게 자리잡은 숙소에 지휘관들이 머물게 되었다. 방송사가 내보낼 수 있는 유일한 장면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는 전차들의 주검 뿐이었다.
모든 기자와 직승기에 첩보대가 배치되었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통제의 대상이었다. 곳곳에서 입수된 첩보를 분석한 결과 우국의 통신암호가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짤막한 기사자료가 제공되었다. 이것이 방송으로 나오자 토론실은 경악에 휩싸였다.
하지만 국방부 장관과 중립 동기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즈막한 말을 주고 받으며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지금부터 모든 통신을 차단하고 오염되지 않은 것으로 유일하게 판단된 첩보대의 암호로 상황을 통제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뒤이어 전해졌다.
일선 부대의 모든 통신이 중단되었고 전화국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뒤이어 이동전화 중계소도 마비되었다. 민명방송들도 송신이 중단 되었다. 유일하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것은 국영방송 뿐이었다. 그것도 TV와 라디오 각 1개의 통로만 열려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조치가 끝난후 부터 방송에 이상한 소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모르스 통신이었다. 중앙전선에서 처음 발신된 모르스 부호는 시간이 자나감에 따라 각지에서 타전되고 있었다. 통신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국방부 장관도 처음 들어보는 암호체계였다. 자신이 알고있는 해석으로는 도무지 말이 안되는 기호나열이었다.
제국 전차의 양익이 철수한후 전장을 수습한 서부전선에서 성명서를 발표했다. 방송에 따르면 제국이 우국의 암호를 입수해 지휘관의 동태를 세밀히 파악했으며 이번 기습도 그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일선에 있는 지휘관은 물론 후방에 있는 모든 지휘관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첩보도 곁들였다.
군부대 내에 있는 지휘관들에 대한 안전조치는 다 이루어 졌으나 외부에 있는 지휘관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그에대한 추가 조치를 취하려 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조사결과 국영방송국에 있는 지휘관들이 가장 심각한 위협에 처해있다는 부분에 이르자 토론장에 있는 정치인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 무슨소리를 하는거야... 밖에 철통같이 경호하고 있는 중무장 병력이 안보이나?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지휘권을 인수하러 들어갔던 정치권 지휘관들의 연락이 두절되어 버린후 좌불안석에 놓이게 된 정치권의 볼멘 소리였다. 밖에 있는 친위병력이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것이다.
그때 방송중단 조치가 취해졌던 민영사를 통해 국영방송 외곽에 배치된 군병력의 모습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중화기로 무장한 병사들이 외곽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비추자 내부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병력이 대부분 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경계가 아닌 내부공격 포진이었다.
이 화면이 나가자 정치권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잠시후 성명서가 계속되었다. 우국전력의 핵심인 지휘관들을 지키기 위해 상황이 수습된 서부전선의 전차부대 일부를 국영방송국으로 출발시킨다는 것이었다. 정치인들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했다.
모든 상황이 통제되고 있으니 제국은 섯부른 시도를 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미사일 기지에 내린 조치를 공개했다. 우국에 대해 총알 한발이라도 날리면 모든 미사일을 발사해 버릴 것이라는 최후통첩이었다. 또한, 이륙 대기를 하되 첩보대의 허가없이 출격하면 우국의 전투기라도 지체없이 격추시켜 버린다는 단속도 있었다.
이제 우국 전체가 첩보대의 통제속에 들어가 있었다. 어떤 병력도 움직일수 없었고 그 누구도 통신을 주고 받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통신 소리가 방송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이번 사태에 연루의혹이 있는 정치인과 고위층 인사들에 대한 실시간 감시가 이루어 지고 있다는 발표도 있었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일단의 전차들이 국영방송국에 도착했다. 규모를 압도하는 전차병력에 두손을 든 경계병들이 삽시간에 무장해제 당했다. 그들을 본대로 복귀시킨 후 방송국에 진입한 병사들이 지휘관들의 안전을 확보했다. 단, 하루만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난 것이었다.
따로 회의실을 마련한 국방부 장관과 중립 동기들이 어쩔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외길만 남았습니다. 멈추면 우국이 절단나고 지체하면 군부가 정치를 장악해야 하는 막다른 상황입니다." 작전처장이 결연한 표정으로 국방부 장관을 바라보았다.
"할수 없지... 자네들 생각대로 밀고 나가게... 내 힘이 닿는데 까지 보태겠네..." 퇴역후 처음으로 중립동기들을 매료 시켰던 눈빛을 다시 뿜어내며 국방부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국은 태풍의 눈속에 진입한 것이다. 섯불리 벗어나면 폭풍에 휘말리고 그냥 주저앉으면 영원히 갇혀버리는 기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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