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비대
이곳은 가장 한가한 근무지 였다. 중앙전선 선두에 겹겹이 구축된 참호에 가장 많은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고 그 뒤를 기계화 사단이, 더 들어와 앉은 포병부대가 지원공격을 분담하는 구조상 예비대는 평시와 다름없이 늘어지는 무료함을 참호파기 작업으로 달래고 있었다.
포진지에서 부터 일정한 거리마다 참호를 구축했고 그 사이사이에 수백개의 개인호를 파는 작업이 총쏘는 일보다 더 중요한 부대의 임무였다. 갖 배치된 신병들의 야리야리한 팔뚝이 머지않아 아름드리로 변할수 밖에 없는 곳이다.
요즘은 스무살도 안된 앳된 소년들로 보충되고 있었다. 전쟁 초기에는 그럭저럭 쓸만한 병력이 보내졌지만 열세를 간신히 면하고 있는 제국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증발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조만간 미성년자 부대로 완편될지 모르겠다는 우스개 소리가 선임들 사이의 농담이 된 곳이다.
소년병의 첫 주자는 전략 이라는 이름을 가진 열일곱살 내기였다. 특이한 이름에 어린 나이의 안스러움까지 든 부대장은 이곳에서는 정말 할일이 없는 전령으로 보직을 주었다. 무전통신 교육을 이수한 뒤에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곳저곳 어슬렁 거리며 꽤 바쁜척 할만큼 적응이 된 모양이다.
이렇게 평이한 시간을 보내던 예비대가 제국군의 공격을 통보받은 것이 바로 어제였다. 우기로 사흘째 비가 내리고 있어 참호의 배수로가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고 전방 30m도 분간하기 어려운 폭우를 틈타 침투용 경수송기로 포진지까지 뒤덮듯 침투하는 야간기습을 당해 함락 직전이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군의 총공세가 중앙침투와 동시에 모든 전선에서 펼쳐지고 있어 전력지원이 불가능 하다는 사령부의 연락이 곧이어 들어왔다. 이제 이곳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포진지까지 그 넓은 지역을 일시에 공격하는 규모에 성격상 대규모 특수부대 일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부대장은 한숨을 내쉴수 밖에 없었다.
그는 수 많은 경수송기가 활발한 우국군의 정찰과 첩보활동에 발각되지 않았던 것은 이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거목들이 군락을 형성한 대평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연료대비 비행거리를 추산하기 시작했다. 최소 수만명 이상으로 보이는 침투병력 규모로 탑승인원을 대입하자 얼추 계산이 나왔다.
그들이 왜 이곳까지 곧바로 치고들어오지 않았는지 의문이 풀렸다. 대평원에서 최대인원을 태우고 비행하자면 보조연료통을 달수 없었을 것이다. 포진지 까지 도달하는 게 최대 한계로 보였다. 제국군이 아래지역을 장악한다고 해도 경수송기를 다시 이륙시킬 연료가 아예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한가지 꺼림찍한 것은 그들이 탈취할 우국군의 장비였다. 전차나 대포의 방향을 이곳으로 돌릴경우 그냥 무너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함락이 확실시 될때는 모든 장비와 탄약을 제거하는 준비된 진지수칙이 있는만큼 이부분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포진지와 이곳에 이르는 개방된 길목에 장애물을 설치한 병사들이 폭우를 뚫고 달려오고 있었다. 상황발생이 알려지자 마자 수없이 훈련해 왔던 조치를 일사천리로 취한 것이다. 이제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는 지뢰와 폭발물 덫 그리고 수많은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
그때 커다란 폭음들이 저 아래쪽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려 삼십분 넘게 메아리를 보내던 폭발이 잦아들기 시작했지만 띄엄띄엄 콰광하는 울음이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진지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최후까지 주어진 임무를 완수한 동료들을 생각하며 하염없는 빗물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대규모 특수부대라고 해도 이렇다할 운반수단과 장비없이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흘 정도의 시간이 확보된 것이다. 침투 직전까지 중앙전선에 전개된 제국군의 병력은 가장 가까운 것이 이틀 거리 였었다. 그랬기 때문에 별다른 일이 없을 것이라고 우국군이 안심했던 것이다.
앞으로 2일 동안 제국의 물자보급이 없을 것이었다. 제국군과 우국군 모두 대공 미사일을 촘촘하게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전투기나 헬기, 수송기가 중앙전선에 가세할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래서 경계시야가 마비될 만큼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는 경수송기를 제국군이 사용했던 것이다.
산너머 후방에서는 신속한 병력전개가 이루어 지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포진지가 구축되었고 각각 주어진 착탄지역을 향해 조준까지 마친 상태였다. 발사신호가 내려지면 중앙진지로 진입하려는 제국군 앞에 탄막 장애물이 형성될 예정이었다.
이것까지 감안한 부대장은 전병력에게 이동명령을 내렸다. 한달에 서너번씩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할당된 물자를 챙긴 병사들이 속속 산위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판에박힌 움직임이 변함없었던 진지가 어느새 텅비었고 미처 닫지 못한 막사와 창고의 문들만 정적을 깨고 있었다.
산위에 올라간 병사들은 자기 위치를 찾아서 총을 거치한 후 수십개씩 챙겨간 수류탄을 내려놓았다. 나무가 별로 없는 바위산 이었지만 적당한 돌들로 은엄폐를 하고 지붕을 만들었기 때문에 작은 공간이지만 비교적 쾌적한 곳이다. 이런때를 대비해 비상식량과 예비탄약을 보관하는 작은 창고도 일정한 거리마다 있었다.
만일을 염려해 미리 올라왔지만 제국군 특수부대가 장애지역을 통과해 진지에 도착한 시간은 예상대로 삼일 후였다. 바로 전날 제국군의 후속부대가 중앙진지 진입을 시도했지만 산넘어로 퍼붇는 우국군의 포탄세례에 깜짝놀라 멀찌감치 후퇴해 버렸다. 부대장이 예상했던 최상의 조건이 된 것이다.
아주 촘촘하게 지뢰를 깔고 덫까지 이중삼중으로 설치해 놓았기 때문에 제국군이 개척한 이동로는 우국군이 평시에 사용했던 길이 유일했다. 차량이 이동할 정도의 폭이지만 수만명에 달하는 병력이 신속히 움직이기에는 비좁은 규모였다. 여기를 조준해 대규모 화망을 구축할 경우 급소가 되는 곳이었다.
문제는 양쪽으로 벌어진 산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기관총의 살상거리를 넘어서기 때문이었다. 제국군의 지휘관 또한 이런 것들을 다 검토한 후 진입을 명령한 것이었다. 진지를 정찰한 제국군은 우선 산위에 있을 우국군의 공격에 대비해 모든 각도를 향해 저격수를 겹겹이 배치했다.
저격이 기본인 특수부대 이다보니 이렇게 수천명을 배치해 놓고도 병력이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제국군이 커다란 구덩이를 메우며 산정상을 향해 진격하는 것을 내려다 보고있는 부대장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제국군 선두가 수류탄으로 폭발물을 제거하며 마지막 구덩이 근처까지 올라올때까지 정중앙 기관총만 쏘았을 뿐 우국군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었다. 소년병들이 손에 땀을 쥐기 시작했고 지켜보기만 하는 우국군 진영에는 긴장감이 극도에 달하고 있었다.
이때 구덩이 곧곧에 수류탄 파편이 날아오르며 제국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치 도미노 처럼 이어지던 폭발은 저격수들이 배치된 진지 지역까지 뒤덮고 있었다. 이때 부대장의 사격명령이 내려졌고 몸을 최대한 숨기고 조준도 없이 총구 방향으로 난사를 시작한 우국군 병사들은 총열을 식혀가며 탄창을 비우고 있었다.
바위 뒤에 몸을 숨긴 투척조는 충격신관식 수류탄을 팔이 아프도록 던지고 또 던졌다. 어디에 적군이 있는지 상관이 없었다. 몸을 최대한 숨기라는 게 부대장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최고수준인 제국군의 저격수들이 표적을 잡아 제거할 방법이 없었다.
어쩌다 표적을 확인했다 싶으면 다른 각도에서 어김없이 총탄이 날아와 자신들이 저격을 당했다. 여기저기서 쓰러지는 동료들을 목격한 제국군 저격수들은 마치 자신들의 위치를 모두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쏘는게 아닌가 하는 불쾌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들이 모든 각도를 조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치로 혁혁한 전과를 거두며 최고의 특수부대로 이름을 날리던 자신들이 당하고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뿐이었다. 더구나 어디서 던지는 지도 모를 수류탄들이 사방에서 터지고 있었기 때문에 집중력까지 분산되고 있었다.
그렇게 하나둘 쓰러진 제국군은 뒤에 대기하고 있던 병력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만의 하나일 뿐이라고 치부했던 일이 벌어지자 대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포진지까지 내려가는 이동로 전체에 우국군의 총알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우 수백명만이 이동로를 살아서 통과할 수 있었다. 총알을 피해 도로를 이탈한 병사들은 지뢰와 폭발물 덫에 걸려 형체마저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결과에 정신히 혼미해진 제국군은 사로잡았던 우국군 포로들을 그대로 남겨둔채 최대속도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지금 남아있는 수천명만이라도 살아서 돌아가야 제국군의 특수부대 명맥이 유지될수 었기 때문이었다. 후방을 담당했던 제2지휘관의 명확한 판단 덕분에 존재가 사라질 뻔 했던 특수부대가 기사회생하는 순간이었다. 그토록 냉철한 제2지휘관이었지만 제1지휘관의 생사불명이 응어리지는 느낌을 떨쳐내지 못했다.
시간만 끌면 된다고 생각했던 전투에서 강력한 제국의 특수부대를 몰살시킨 엄청난 결과가 우국군 병사들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서로 놀란 눈빛만 교환할 뿐 무엇을 해야할지 머뭇거릴 뿐이었다. 자기 주변에 다친 동료가 아무도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집결하고 있는 삼삼오오 모두 무사한 모습에 더 놀라고 있었다.
조준도 하지 않았고 바위 너머로 수류탄을 던진게 전부였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루 휴식을 취하는 동안 제국군중 아직 사망하지 않았던 부상자들이 모두 눈을 감았다. 치명상을 면한 이가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내려갈 경우 생존한 적군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고 결국 한사람 한사람 확인사살을 해야했을 상황을 피하려는 부대장의 결정이었다. 전장확인이 끝나고 부대장이 가장 먼저 향한곳은 무기고였다. 소수의 인원만을 데리고 수류탄이 널려있던 창고로 들어간 부대장은 남아있는 것을 모두 수거하라는 지시를 했다.
세어보니 수십여 상자에 불과했다. 제국군이 거의다 가져가서 사용했던 겄이다. 이십분후 부대장 일행이 가있는 고개너머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류탄 소리이기는 한데 한두개가 터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다시 돌아온 부대장 일행은 침묵을 약속한듯 이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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